1993년 9월 남포동 극장가 모습.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가 남포동의 화려했던 시절을 말해준다. 멀리 가운데 보이는 극장이 지금은 없어진 해성극장이고 오른쪽 맞은편 부영극장도 이제는 문을 닫았다. / 국제신문 자료사진

#광복의 기쁨 담은 광복동

남포동 광복동 일대는 일제시대 일본인 집단거주지였다. 용두산공원엔 일제말기 일본 신사가 설치됐다. 지금도 일본식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살고 번화한 지역이던 이곳을 되찾았다는 의미에서 광복동이라고 이름했다. 남포동 역시 해방후 영도의 남항동과 마주보고 있는 포구라는 뜻에서 남포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해 부산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250만명의 절반을 차지하는 일본인들은 부산에 오면 반드시 남포동 일대를 들른다. 그들은 한국 제2도시 중심부에서 자신들의 흔적을 확인하고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남포동 일대는 우리에게는 오욕의 역사이지만 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과거라는 점에서 묘한 여운을 던진다.

부산 중구청이 올초 발표해 논란을 불렀던 일본인 거리 조성 계획도 남포동 일대의 역사적 특성때문이다. 용두산 공원을 중심으로 옛 미화당백화점~광복로~부산호텔~옛 동광초등학교~옛 미문화원으로 이어지는 'ㅁ'자 모양의 일본인 거리 조성은 일본인 관광객 유치와 민족적 자존심 간의 갈등이다. 남포동은 결국 한국과 일본이 가장 먼저 충돌하고 타협안을 도출해내는 공간인 셈이다.

부산극장의 최근 모습.

#자갈치·국제시장의 억척스런 삶

해방후 부산항을 통해 귀환한 일본동포나 6·25전쟁후 부산으로 쏟아져 들어온 피란민들은 주로 남포동 일대에 정착했다. 용두산공원에 판자촌이 형성됐고 자갈치시장 국제시장이 시장다운 면모를 갖추어갔다. 여기에 부평시장(깡통시장) 신창시장 창선시장이 더해지면서 이 일대는 전국적 명성을 자랑하는 재래시장으로 발전한다.

국제시장 상가번영회 금중관 과장은 "1970년 충무동 시외버스 주차장이 옛 조방터로 옮겨가면서 부산진시장 평화시장으로 상권이 이동하기 시작했고, 90년대엔 백화점 대형유통점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국제시장의 입지가 좁아졌다"고 설명했다.

평북 의주 출신으로 50년 넘게 국제시장을 지키고 있는 이병태(82·4공구 특일사 대표)씨는 "많은 상인들이 국제시장에서 억척스럽게 돈을 벌어 아이들 대학보내고 집안을 일으켰다"며 "한일합섬 창업주 김한수씨, 동서·고려해운 사장 양재원씨, 동양시멘트 대표 이양구씨 등도 국제시장 출신"이라고 밝혔다.

구덕로를 사이에 두고 남포동 극장가와 마주한 자갈치시장은 시큼한 바닷내음과 비릿한 생선 내음, 자갈치 아지매들의 고함소리가 뒤섞여있다. 회를 먹지 않는 외국인들도 자갈치시장의 노점풍경을 신기한 표정으로 둘러보고 갈 만큼 부산의 속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현장이다.

구동회 자갈치시장 어패류조합 조합장은 "70년대엔 동해 남해 서해의 자연산 고기가 모두 자갈치로 왔다"며 "손님이 먹는 회가 모자란듯 싶으면 공짜로 더 썰어줄 정도로 인심도 푸짐했다"고 회상했다. 구 조합장은 또 "일본인이 소식가라는 이야기는 틀린 말이다. 자갈치를 찾은 일본인들은 자기 나라에서는 비싸서 제대로 못먹던 회를 양껏 포식하고 간다. 일본인들도 알고보니 대식가더라"고 자갈치회맛을 간접적으로 자랑했다.

1984년 광복로의 모습. 지금은 사라진 포니택시가 눈길을 끈다. / 부산 중구청 제공

# 용광로처럼 분출하던 젊음

80년대까지 남포동은 젊음의 광장이었다. 영화와 음악이 있고 화랑과 주점이 있었다.

젊은이들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거나 음악다방에서 클래식이나 팝을 듣고, 고갈비골목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열띤 얼굴로 인생을 논하고 사랑을 논했다. 주머니는 빈약했지만 열정만큼은 철철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서면 광안리 해운대는 젊은이들을 사로잡기엔 아직 어렸다.

부산극장 하봉근(67) 상무는 "극장 사무실에서 지금의 PIFF광장을 내려다보면 인파에 길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떼밀려갔다. 토요심야뿐이던 1982년 영화 '람보'는 11일 연속 심야상영을 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동명극장 부영극장 제일극장 등 개봉관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PIFF의 무게중심도 해운대로 이동하는 추세다.

1981년 남포동에서 부산 최초의 음악감상실 '필하모니'를 열었던 조영석(53)씨는 "70년대 오아시스 백조 등 클래식음악다방으로 시작된 남포동의 음악적 분위기는 80년대까지 이어지다 90년대부터는 클래식이 사라지면서 다방문화도 단순히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아쉬워했다.

조씨는 "당시 음악다방이나 주점에서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동호인들이 함께 어울려 문화와 예술을 이야기하고 인간과 철학을 논하는 등 남포동이 부산문화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고 밝혔다.

호주머니 얄팍한 청년들에게 미화당 백화점 뒤편 고갈비 골목은 더없는 안식처였다. 돈이 모자라면 학생증이나 시계를 맡기고 푸석한 고갈비 한점에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키던 청년들이 이제는 50~60 중년이 되어 한번씩 골목을 찾아와 추억을 마시고 간다. 골목 양쪽으로 10여집 이상 번성했던 고갈비집은 이제 한순돌(77) 할머니의 '할매고갈비' 등 3곳만 남았다.



#앉아서 장사하던 시절

구두방 골목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남포동상가번영회 송주팔 총무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빈 가게가 없어 최소한 반년은 기다려야 했고, 권리금만 수억원씩 오갔다"며 "구두방 골목에 사람들이 넘쳐나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장사가 됐다"고 말했다.

지금은 남포동이라는 이름만 믿고 달려들었다가는 망하기 십상이다. 몇개월씩 임대료가 밀린 가게도 많다. 광복로 패션거리는 상당수 철수한 상태. 광복로 중심인 시티스폿에 위치한 옛 미화당백화점은 수년째 비어있고, 맞은 편 1층 노른자위 상가도 셔터가 닫힌 지 오래다.

이곳에 위치한 창선파출소 안창수 경사는 "7~8년전에도 이곳에 근무했었는데 요즘은 취객도 없고 너무 조용하다. 한달에 평균 2~3곳이 개업하는데 결국 최소한 수천만원의 인테리어 비용만 날리는 셈이다"고 말했다.

광복로 중심인 시티스폿. 새천년광장이 조성돼 있으며 광복로 축제 등 각종 행사의 중심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