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주름잡던 디스크자키
- 2007년 퇴직 후 음악카페 차려
- LP 4000장· CD 8000장 빼곡
- 시민회관서 영상음악회도 개최

- "돌아온 LP 대한 관객들 반응
- 복고 향수 아닌 새로운 유행
- 원도심 일대 가득했던 음악실
- 한 곳 만 복원해도 대박날 것"

베테랑 DJ는 아주 능숙하게 턴테이블에 판을 얹었다. 바늘이 장착된 수동 카트리지가 공중에 솟구쳤다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곡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마치 솔개가 먹잇감을 낚아채는 듯했다. "눈은 좀 어두워도 손떨림은 아직 없어요. 손이 떨리면 판을 긁죠." 베테랑 DJ는 싱긋 웃으며 스피커 볼륨을 높였다. 비틀즈의 '헤이쥬드'가 빵빵하게 쏟아졌다.

도병찬 DJ가 부산 대연동 음악카페 '라디오'에서 추억의 LP 앨범을 턴테이블에 올리고 있다. 그는 "광복동의 옛 무아음악실 같은 지역 음악 자산을 복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순룡 선임기자 seosy@kookje.co.kr

부산 남구 대연동 카페 '라디오'는 한산했다. 'DJ의 전설' 도병찬(67)은 그곳에서 여전히 LP(Long-Playing record)판과 턴테이블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한물 간 줄 알았던 LP가 요즘 그를 바쁘게 만들고 있다. 부산시민회관이 기획해 지난 4월부터 매월 한 차례씩 여는 추억의 영상음악회 '도병찬의 뮤직파일'이 갈수록 인기다. 지난달엔 시민회관 소극장에 300여 명이 찾아들었다.

아날로그의 마지막 전사처럼 뮤직박스를 지키는 도 DJ를 만나 '새로운 LP시대'의 자산과 트렌드를 짚어봤다.



#음악은 늙지 않는 묘약

-재현한 DJ 박스 안에 앉아 멘트하는 걸 보니 옛날 음악다방이 생각난다.

"요즘 세상에 LP를 틀고 영상음악회를 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놀라더라.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이렇게 먹히는 건 사람들 가슴에 갈구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음악과 함께 해서 그런가, 늙지도 않는 것 같다.

"음악의 마력일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음악은 그때 그 시절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영화에서 봤는데,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치매환자에게 음악을 들려줬더니 옛날의 기억을 복원해 내더라. 뇌의 기억의 방에 있는 장치가 고장나면 치매가 되는데, 그것을 음악이 복원해 낸다는 말이다. 음악치료가 가능한 이유다."

-음악이 묘약인가?

"그렇다. 음악은 30년전, 40년전의 상황과 감정을 되살려준다. 그걸 들으려면 턴테이블에 LP를 걸어야 한다."

-6·25 이후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는 대부분 LP판을 들으며 컸다.

"그들은 음악적으로 축복받은 세대라 할 수 있다. 비틀즈를 비롯해 레드제플린, 킹크림슨, 롤링스톤즈 같은 전설의 뮤지션들이 이때 등장했다. 이들의 명곡에 열광하며 함께 늙어간 지금의 60~70대 분들은 최고의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야외 전축에 백판 올려놓고 신나게 춤추던 광경이 기억난다.

"그때 돌아다니던 것들이 대부분 시장통의 해적판 LP였다. 야외 전축에 판을 걸어 흙먼지 피우며 고고춤 추던 '백판 키드'들이 그리워진다."



#LP시대의 뉴 트렌드

-최근의 LP바람은 귀환, 복고 정도로는 설명이 안될 듯하다.

"난 뉴 트렌드로 읽고 싶다. 뉴 트렌드로서 LP시대가 열린 것이다. LP 판매량이 전세계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일시적 유행이 아니란 얘기인가.

"분명 새로운 트렌드다. 과거에 LP를 들은 40대 이상뿐만 아니라 신세대들까지 가세해 하나의 시장이 형성된 분위기다. 침체되고 있는 오프라인 음반시장에서 LP판은 역성장을 한 셈이다. 얼마전 아이유 김동률 버스커버스커 백지영 등이 LP를 발매했고 김광석, 조용필 등의 옛 음반이 LP로 재출시됐다."

-디지털 음원과 LP 음악은 어떻게 다른가.

"MP3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은 왠지 증류수 같다. 반면 LP는 미네랄이 섞인 자연수다. 디지털 음원이 사진과 같은 '점'이라면, LP 아날로그 음악은 유화와 같은 '선'이다. LP는 귀가 편하고 소리에 여운이 있다. 오래 들어도 피곤하지 않다."

-LP의 한계도 엄연히 있지 않나?

"음반과 턴테이블이 있어야 하고 스피커가 필요하다. 그런 수고로움이 감동을 만들어낸다. 요즘은 젊은 친구들이 소장하기 위해, 데코레이션 개념으로 LP를 사는 경우도 많더라."



#전설의 DJ 계보

-도병찬은 DJ계의 전설로 통한다. DJ 계보를 짚어달라.

"정리된 건 없지만 우리끼리 얘기하는 것은 있다. 전국적으로 1세대는 이종환 최동욱, 2세대는 박원웅 김기덕 김광한 황인용 등을 꼽을 수 있다. 지방에서는 70년대 들어 활동한 나(도병찬)와 대구의 김진규, 부산의 윤문규(세미) 등을 들 수 있다. 난 1.5세대 쯤 되지 않을까 한다."

-부산은 광복동 무아음악실의 DJ들을 빼놓을 수 없다고 하던데.

"무아는 70~80년대 부산 시민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대중음악감상실이다. 광복동 입구의 용두산 공원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근처에 있었다. 여기서 백형두 배경모 이영철 강동진 세미(윤문규) 유영근 이상민 최일락 등과 같은 전국적 스타 DJ가 나왔다. 무아에서 떠서 방송에 진출한 케이스가 많았다."

-옛날엔 음악다방이 많았다는데.

"70년대 부산 광복동에는 무아 이외에도 칸타빌레 목촌 하늘소 수다방 청다방 등 30여 곳의 음악다방이 성업했다. 여기서 일한 DJ들이 100명쯤 된다. 항구도시 부산은 팝음악 수입에 유리한 여건이었고 하야리아 부대가 있어 최신 음악과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무아음악실을 살리자

-음악적 인프라가 이어지고 있는가?

"부산은 90년대 중반까지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자체 음악 트렌드를 발신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전통이 날이 갈수록 희석되고 있어 안타깝다."

-음악 자산을 살릴 방안이 없을까.

"대구 향촌동에 전통있는 고전음악감상실 '녹향'이란 곳이 있다. 유지가 어렵게 되자 대구 중구청에서 지원해 무료로 운영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예술인과 주민,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다고 한다. 전통을 지키면서 관광콘텐츠화 한 사례다. 부산 광복동 일대에는 이보다 더 좋은 자산이 많다."

-잘 하면 원도심 살리기도 가능할 것 같다.

"원도심 살리기가 별건가. 전설적 DJ들이 거쳐간 무아음악실 하나만 복원해도 원도심이 달라질 걸로 본다. 왕년의 DJ들이 나타날 거고 팬들도 몰려들 거다. 사람이 북적거리면 관광객이 찾아들고 지역경제도 좋아질 것 아닌가."

-새로운 발상과 시도가 필요하겠다.

"지금 '액티브 시니어'들이 갈 곳이 없다. 50대 이상 중 장년층과 노년층을 잡는 문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들은 예전에 놀아봤던 분들이다. 돈도 쓸 줄 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갈 곳은 산밖에 없는 것 같더라. 이들을 위한 음악감상실이나 시니어 영화관 등을 만들면 새로운 문화창출이 가능하다. 이른바 시니어 비즈니스다. 사회적 지역적 관심이 절실하다."


# 경성대 앞 예술공간들, 문화거리 이름 붙입시다

■ 인터뷰 언저리

도병찬 DJ가 부산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진행하는 추억의 영상음악회 모습.

'DJ의 전설' 도병찬은 대구 출신이다. 1970년대 초 그는 대구 팝송 문화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한국FM방송(bbc)의 DJ로 입문했다. 어릴 적엔 대구 향촌동의 음악다방을 돌면서 귀를 뚫었다고 한다. 방송통폐합이 단행되면서 그는 1981년 10월 KBS부산총국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가 맡은 '뮤직 파일' '오픈 스튜디오' '즐거운 저녁길' 등은 DJ 도병찬의 진가를 확인시킨 음악 프로그램들이다.

도병찬이란 이름이 요즘 신세대에겐 낯설지 모르지만, 한창 때 그는 가수들과 청취자들의 우상이었다. 70~90년대 DJ는 인기인이었고 가요계의 절대권력자였다. DJ의 손에 노래가 죽고 살았다.

2007년말 정년퇴임한 도병찬은 이듬해 남구 대연동에 '라디오'라는 음악카페를 열었다. DJ를 하며 모은 8000여장의 CD와 4000여장의 LP가 이곳에 진열돼 있다. 손님이 원하면 바로 틀어주기도 한다.

도병찬은 지역문화 지킴이면서 개척자이기도 하다. 1990년대 초 부산재즈클럽을 만들 때 산파역을 했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예술기획을 지원하고 있다.

여전히 현역처럼 활동하는 도병찬은 "경성대 앞의 다양한 문화·예술 공간들을 하나로 꿰는 전략이 필요하다"면서 아이디어를 하나를 던진다.

"도시철도 2호선 경성대·부경대 앞역 1번 출구를 나오면 문화거리가 형성돼 있어요. 자연발생적이죠. 윤형빈 소극장과 제가 운영하는 카페 라디오, 그 아래에 문화골목과 재즈클럽 몽크, 라이브를 하는 바이널 언더그라운드, SL55 같은 곳이 밀집해 있어요. 이 멋진 콘텐츠들을 꿰면 그대로 '테마 문화거리' 혹은 '예술거리'가 됩니다. 하다 못해 안내판 하나만 붙여도 달라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