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유신이가 왔습니다
서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만명이 주름진 손으로
서현의 앙상한 얼굴을 쓸었다

만명은 떨리는 손으로
남편의 귀에 금귀고리를 채웠다
여보, 삽랑주로 먼저 가 계세요
나도 곧 갈게요, 그때까지
이 귀고리를 나인 듯 여기고
기다리세요


"대부인 마님! 어서 와보셔요! 나리께서 정신이 돌아오셨어요!"

만명(萬明)은 비녀 금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만명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남편의 병석을 지킨 지 반 년째였다. 만명은 당혜를 꿰어 신고 사랑채로 나갔다. 해질녘이건만 방안이 어둑신했다.

"나리, 정신이 드셨습니까."

남편은 한참동안 반응이 없다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지난 늦가을 쓰러졌던 김서현(金舒玄)은 겨우내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서현의 얼굴은 백랍처럼 창백했고 흰 수염이 맥없이 턱 아래 늘어져 있었다. 만명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남편의 흐린 눈빛에선 오십 년 전 자신을 향했던 뜨거운 사랑의 눈길을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천군만마를 호령하며 전장을 누비던 용맹한 장수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시,신이를…."

"삼광 아비를 불러오란 말씀이오니까."

삼광 아비란 큰아들 유신(庾信)이었다. 마흔일곱의 장년인 유신은 그 무렵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북 경산)군주로 외직에 나가 있었다. 급마를 띄워 연락한다 해도 왕복 너댓새 길이었다.

"알겠어요. 속히 불러올 테니까 그때까지 기력을 잃지 마셔요."

만명은 대청마루로 나섰다. 어느새 어스름이 내려 앉아 있었다.

"영돌 애비 게 있느냐!"

곧 칠손이가 달려왔다. 서현의 집안에서 대물림한 충직한 씨종이었다.

"자네, 영돌이를 이 길로 압량주로 보내게. 나리가 긴히 하실 말이 있으니 군주더러 시각을 지체 말고 달려오란다고…. 집안에서 가장 빠른 말을 내어 주게."

만명은 둘째 아들인 흠순과 딸인 보희와 문희에게도 전갈하게 했다. 방안으로 되돌아오니 서현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눈앞에 문득 젊디젊은 서현의 모습이 스쳐갔다. 만명은 기억의 갈피를 뒤져 오십 년도 더 지난 희미한 영상을 찾아냈다.

	양산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귀고리

만명이 서현을 처음 만난 것은 열일곱, 황룡사에서 열린 팔관회에서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탄 남여 뒤로 만호부인과 동륜태자(銅輪太子) 사이에서 낳은 씨 다른 오빠인 백정(伯淨)과 만명의 가마가 뒤를 따랐다.

"물렀거라. 왕제(王弟)마마 행차시다!"

구종별배의 요란한 벽제 소리에 백성들이 길 양편으로 쫙 갈라지며 길을 텄다. 아버지 숙흘종(肅訖宗)이 금상인 진흥왕의 동생이었고 어머니 만호(萬呼)부인은 선왕인 법흥왕의 딸이자 금상인 진흥왕의 여동생이었으니 그야말로 몇 남지 않은 성골(聖骨)이자 왕실의 핵심으로 그 위세가 여느 귀족에 댈 것이 아니었다.

붉은 능라 저고리와 치마에 포를 겹쳐 입고 당분(唐粉)을 옅게 바른 열일곱 아리따운 만명이 가마에서 사뿐히 내려섰을 때 한 마리 부전나비가 나폴나폴 날아든 듯 했다. 널따란 금당 안 장륙존상 앞, 향로와 연화로 장식된 공양상 위에는 향기로운 오곡과 백과가 진설돼 있었고 백고좌(百高座·팔관회에 참석한 백명의 고승의 자리)도 마련됐다. 금상이자 만명의 백부인 진흥대왕께서 연(輦)에서 내려 황금빛 어좌에 착석하면서 입제가 시작됐다. 고승들이 법문에 나섰다.

그때였다. 만명은 자신의 볼에 닿는 시선을 느꼈다. 서너 줄 뒤로 비껴난 자리에 한 청년이 앉아 있었다. 만명을 넋 놓고 바라보던 청년은 시선이 마주치자 찔끔해서 고개를 돌렸다.

	금동말안장

누굴까.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거둬들이려는데 문득 만명의 가슴이 철렁했다. 청년의 얼굴에선 알 수 없는 우울과 비애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우수의 그늘은 투망처럼 청년을 꽁꽁 처매고 있어서 원래부터 그의 몸에 붙어있던 비늘 같았다. 금방이라도 눈물 한 방울 흘러내릴 듯 우수에 잠긴 청년의 긴 속눈썹을 보는 순간 만명의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만명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설렁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법회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만명과 청년의 눈길이 다시 스쳤다. 걸음을 옮기다 뒤돌아보니 청년은 우르르 몰려 나가는 대중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서 홀린 듯 만명의 뒷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다시 만명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

그 청년은 각간(角干)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이라 했다. 무력이라면 전왕인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된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아들이 아닌가. 만명은 비로소 그 청년의 눈매가 그토록 구슬펐던 까닭을 알아챘다. 나라는 그들에게 진골 신분을 주어서 귀족으로 예우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승전국의 수도로 끌려온 망국민일 뿐이었다. 만명은 다시 가슴 한편이 싸아해졌다.

만명이 서현을 다시 만난 것은 한 달 후였다. 그 동안 그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리에 누우면 어둠 속에서 사내의 얼굴이 달처럼 떠올랐다. 마침내 만명은 붓을 들어 편지를 썼다. 그리고 시녀인 버드내에게 쥐여 보냈다.

초닷새 아기달이 어스름하게 비치는 나정 숲이었다. 훌쩍하니 키 큰 사내는 길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 아래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만명이 다가서는 기척에 사내가 돌아섰다. 그리고는 뚜벅 입을 떼었다.

"고귀한 공주께서 저처럼 한미한 자를 야심한 시간에 만나자 한 까닭이 무엇이오."

	금동관

만명은 고개를 수그린 채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글쎄, 사내에게 편지를 보낸 까닭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제 가슴 속에 그런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는 줄은 만명 자신도 미처 몰랐던 터였다. 우두커니 서 있던 사내가 숲 속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가더니 널따란 반석 위에 걸터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공주께서 보내신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생시의 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소. 이 나라 최고의 고귀한 여인께서 나를 만나자고 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소. 오늘 여기 오면서도 긴가민가했지요."

만명은 저고리 고름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소쩍새가 울었다.

"지금도 나는 그대와 나란히 앉아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소. 지금 내 가슴이 얼마나 뛰고 있는지 그대는 모를 거요. 하지만… 공주께서 숲으로 들어와 내 앞에 선 순간 나는 벼락 맞은 듯 내 처지를 깨달았소. 아, 이 여인은 나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로구나.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신분이로구나. 내 사랑은 무망하구나."

만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들어 사내를 쏘아보았다. 푸르스름한 달빛 속 사내의 얼굴이 짙은 고뇌에 물들어 있었다.

"아니에요!" 만명의 입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새 나왔다.

"공자께서 고매하고 강건한 인품을 가지신 분이란 걸 저는 처음 본 순간 알아챘어요. 제가… 공자께 이끌린 것은 눈매에 서린 슬픔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제 가슴도 찢어질 듯이 아팠지요. 지난 한달 동안 공자를 밤낮으로 떠올리면서 저는 공자의 고뇌가 제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졌어요. 물론… 숱한 어려움이 따르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를 연모한다면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제 사랑을…믿어요."

사내는 고개를 수그린 채 말이 없었다. 다시 정적이 오래오래 흘렀다. 이윽고 사내가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사내의 꺼칠한 입술이 제 입술 위에 천천히 얹힐 적에 만명은 눈을 감았다. 소쩍, 소쩍, 생각났다는 듯 소쩍새가 다시 울었다.

만명과 서현은 그날 이후 남의 눈을 피해 밤마다 만났다. 때로는 나정 숲에서, 때로는 계림에서, 때로는 반월성 밑 민가에서 만나기도 했다. 뜨겁고 달콤한 정사가 끝나면 서현은 만명에게 팔을 베어주고 고향 삽량주(歃良州·지금의 경남 양산시) 이야기를 했다. 낙동강이 흐르고, 넓은 벌판이 있고, 낮고 부드러운 구릉이 있는 아름다운 그곳의 이야기를 들려준 끝에 이렇게 말했다.

"난 언젠가는 삽량주로 돌아갈 거요. 이 답답한 금성을 벗어나서 그곳에서 당신과 함께 초막을 짓고 논밭을 갈면서 소를 키우면 얼마나 좋을까."

서현이 만명에게 굵은 금귀고리를 준 것도 그때였다. 변하지 않을 사랑의 징표였다.

만호부인이 만명의 행적을 알게 된 것은 석 달 후였다. 그녀는 딸을 내당으로 불러 나직하지만 서릿발 같은 어조로 추궁했다.

"네가 정말 미쳐버린 게로구나. 성골의 신분으로 어디 사람이 없어서 한낱 망해버린 나라의 볼모 따위를… 너는 백정과 혼인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이 나라의 왕후가 되어야 할 몸이다. 안 되겠다. 당장 무슨 수를 써야겠다."

만명은 그날로 별당에 연금되었다. 부인은 커다란 자물쇠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백정과 만명의 혼사를 준비해 나갔다. 아내로부터 청을 받은 숙흘공은 서현을 멀고 먼 변방인 만노군(지금의 충북 진천)의 태수로 쫓아버렸다. 갇힌 만명은 정화수를 떠놓고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다. 자비로운 석가세존이시여, 저희의 사랑을 버리지 말아주옵소서. 저희의 사랑을 저승이 아니라 이승에서 꽃피게 해 주옵소서.

하루, 이틀, 사흘… 마침내 한 달이 흘렀다. 백정 오라비와의 혼인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만명은 밤새 울며 기도하다가 기진해 쓰러졌다. 그때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에 먹장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이윽고 거센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천둥이 울고 번개가 쳤다. 자물쇠가 굳게 잠긴 별당 문이 벼락을 맞아 기우뚱하게 자빠져 있었다. 만명은 옷가지 몇 벌과 패물함의 물건을 작은 버들고리에 쓸어 넣어 말 등에 묶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만명은 말에 올랐다. 그리고 박차를 가하며 나지막이 외쳤다.

"얼른 가자꾸나. 나는 이제 서방님이 계신 곳으로 간다."

열흘 만에 만노군 관아에 닿았을 때 서현이 기뻐 어쩔 줄 모르던 모습이라니. 일국의 공주에서 녹봉 몇 푼 되지 않은 변방 관리의 아낙이 되었어도 만명은 행복했다. 남편을 위해 생전 해보지 않은 밥과 빨래를 하면서도 나날이 즐겁고 새로웠다. 유신이 태어난 것은 이듬해 가을이었다.

서현과 만명이 만호부인의 용서를 받은 것은 십 년이 지나서였다. 그 사이에 아버지인 숙흘종도 세상을 떴다. 진흥대왕이 붕어하시고 오라비 백정이 왕위에 올라 있었다. 만호부인은 이제 태후였다. 태후의 눈에 들기 위해, 망국의 볼모 노릇으로 인생을 마치지 않기 위해 아니, 만명의 자랑스런 남편이자 유신의 든든한 아비가 되기 위한 서현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목숨을 걸고 여러 번 백제와 싸워 이겼고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해 적군 5000여 명의 목을 베고 함락시키는 무공을 세우기도 했다.

나라의 원훈이 되고 벼슬이 올라갔어도 서현은 늘 만명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함께 침상에 든 밤이면 서현은 만명을 껴안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게 오지만 않았어도 왕후가 되어 궁궐에서 수천의 시비를 거느리고 살텐데…." 만명은 서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마음속으로 답했다. '아니에요. 내겐 든든한 지아비가 있고, 자랑스런 아들과 딸이 있는 걸요. 그까짓 허깨비 같은 왕후는 돼서 뭘 해요.'



문득 서현이 숨을 가랑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만명은 서현의 가랑잎 같은 몸을 감싸 안았다. 장지는 남편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 삽량주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해줄 작정이었다. 유신이 당도한 것은 엿새만이었다.

"아버님! 소자 왔습니다. 유신이가 왔습니다. 눈을 떠보세요."

그러나 서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유신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만명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주름진 손을 뻗어 서현의 앙상한 얼굴을 쓸었다.

"여보, 당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큰 아이가 왔습니다. 이제 눈을 떠 보셔요."

그때였다. 서현의 닫힌 눈꺼풀이 푸르르 떨리며 힘겹게 벌어졌다. 시선이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비로소 유신에게 닿았다. 서현은 조용한 시선으로 유신을 올려다보았다.

"나, 나라에 추, 충성해서…토, 통일대업을… 그, 그리고 어,어머니를…자, 잘…"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현은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고 이튿날 축시에 세상을 떠났다. 관 뚜껑이 덮이려는 찰나 만명은 품속에서 금귀고리 한 쌍을 꺼냈다. 오십년 전 서현이 준 바로 그것이었다. 만명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남편의 귓불에 채워주었다.

'여보, 풍광 좋은 삽량주로 먼저 가 계세요. 곧 나도 따라 갈게요. 내가 갈 때까지는 이 금귀고리를 나인 듯 여기고 기다리세요.'

출상날 만명은 굽은 허리로 대문 밖까지 나섰다. 길고 긴 장례행렬이 산굽이를 빠져나갈 때까지 만명은 문설주에 하염없이 기대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백발을 흩날렸다. 따가운 햇살이 눈을 찔러 만명의 몸이 휘청했다.

강동수 소설가·전 국제신문 수석논설위원

공동기획: 동서대학교,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국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