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르투갈 정복·해적의 요새
- 스페인 지배·그리고 독립
- 지난한 역사를 거치면서
- 모로코 아실라는 쇠락했다
- 1978년 두 '유학파 시의원'이
- 도시복원을 주도하기 전까지는

- 복원 작업에 능숙한 예술가들이
- 이 바닷가 마을에 몰려들었고
- 성채와 마을집에 그림을 그렸다
- 해마다 색과 모양을 바꾸는
- 이 마을의 그라피티 행사는
- 세계적인 축제가 됐다

부산은 지역 사람들의 삶과 환경에 적합한 '그라피티(grafiti·벽 등에 긁거나 스프레이를 뿌려 그린 그림)를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부산에도 그라피티가 그려진 곳들도 또한 그릴 곳도 많다. 그 많은 공간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산은 아직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명화는 미술관에서 잠자고 있지만, 그라피티는 언제나 시민 곁에 있다. 도시의 문화가 그라피티로 살아나면 외지인 여행자들도 함께 그라피티 축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벽화와 짙은 파란색이 인상 깊은 아실라의 가옥.

"너의 책임은 끝났다. 그리고 너는 과거를 미래로 바꿀 수 없다. … 네가 피에로나 예술가가 아닌 이상 너는 죽은 조각상에서 생명을 찾을 수는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네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미래로 기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서 주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허무주의자… 부정적인 자인가? 너는 긍정적인 존재이다. 너의 의지는 다 끝나버린 과거와 관계가 없고, 그보다 너의 의지는 다가올 미래와 관련이 있다… 너의 의지에 따라라.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려보겠다는 데에 너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마라"(장현자 옮김, 압두 알케림 갈랍의 소설 '과거는 죽었다'에서)

기원전 1500년과 현재 2017년 사이 3500여 년 거리를 뛰어넘어 예술가들은 '죽은 조각상'에서가 아니라 폐허가 된 해변 마을에서 생명을 되찾고 있다. 모로코 아실라(Ashilah). 15세기 포르투갈의 정복, 17세기 모로코 세력의 지배, 19세기와 20세기 해적의 기지, 1912년부터 1956년까지 스페인령 모로코의 일부, 1956년 모로코의 독립과 함께 되찾은 해변 마을.

■벽화, 축제로 거듭나다

	모로코 아실라에서 만난 벽화. 파란 옷 을 입은 여인이 악기를 연주한다.

1956년 독립은 됐지만, 아실라는 급속히 쇠락했다. 스페인 사람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그즈음 건국한 이스라엘을 찾아 일시에 떠나버린 것이 원인이다. 1978년부터 도시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유학을 마치고 유엔 등에서 일하다 20여 년만에 고향 아실라에 돌아온 모하메드 베나시아와 당시 모로코 화가협회장 모하메드 멜레히가 시의원이 된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복원 사업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여기 참가한 예술가들은 '과거가 미래로 기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서 줄'뿐만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이 '미래의 창조'는 모우심(Moussem)이라고 부르는 성인들의 축제이자 대규모 시장이 형성되는 시기에 일어난다. 아실라의 성지 메디나와 라이술리 왕궁의 복원 작업을 하던 예술가들이 모우심에서 노닐다가 허물어진 성벽에 둘러싸인 해안 마을의 매력에 빠져든다. 예술가들은 이를 '문화 모우심(Cultural Moussem of Asilah)'이라 이름하며 모여들고 서로 불러들인다.

	문을 파랗게 칠한 집앞에서 방문객이 사 진을 찍고 있다.

화가들은 15세기의 포르투갈 성채 흔적이 남은 카스바(성(城)을 뜻함) 안마을에 예술가촌을 이루면서 집들을 단장하기 시작한다. 이층으로 된 마을 집들은 지면에 맞닿은 아래층의 밑 부분과 문, 창과 같은 출입구는 파란색으로, 그 위는 흰색으로 채색된다. 화가들은 파란색으로 알라의 사도 마호메트에 대한 신앙(샤하다)을, 흰색으로 그 절대 신앙에 대한 순결한 숭배를 표현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슬람 신앙으로 집들을 채색하는 자선(자카)을 베푼 화가들은 종교인으로서, 예술가로서가 아니라 일반인으로 되돌아가서 휴식을 취하곤 했다. 휴식을 휴식답게 해주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낙서를 하는 것일지 모른다. 화가들은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 그라피티로 그림 낙서를 하곤 한다. 화가들은 마을의 벽이나 집과 집 사이 칸막이에 상상의 자유를 펼친다. 그 자유는 종교인으로서 굴레, 화가로서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인간으로서 도덕적 규범을 벗어던지고 어디든 날아가 벽화를 만들어낸다.

■주민과 예술인이 함께

	'인간 군상'을 표현한 그림.

아실라의 수많은 벽화는 꽃을, 여인을, 인간 군상을, 사랑을, 뭔지 알 수 없는 문자를 담고 있다. 벽화의 꽃은 글로 새긴 사랑과 평화 그리고 그 곁에 핀 장미 한 송이다. 벽화의 여인은 파란 원피스를 입고 붉은 맨살을 드러내고 기타의 유래가 된 키타라를 치는 파란 눈의 여인이거나 고기를 매달아 놓은 집의 창문에서 배들이 떠 있는 파란 바다에 물을 붓는, 원피스를 입고 붉은 어깨를 드러낸 여인이다. 벽화의 인간 군상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여인과 그 가지 위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닭과 고양이 그리고 나무 곁에 선 얼굴을 알아볼 수 있거나 없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다. 벽화의 사랑은 잠긴 문에 그린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듯, 껴안고 춤추는 듯, 격렬하게 춤추며 날아가는 듯한 남녀이다. 벽화의 문자는 아랍문자가 색색의 곡선과 뒤섞인 뭔지 알 수 없는 문자이다.

	바닷가 마을 아실라의 전경.

벽화는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다가가 의미를 던져주다가는 수수께끼를 내고 침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수수께끼가 풀리든 풀리지 않든 1년이 지나면 이들 벽화는 다시 흰색 바탕으로 돌아가 예술가를 기다린다. 이것이 바로 해마다 새로운 벽화로 이 도시를 단장하는, 유명한 아실라 국제 문화 축제다.

매년 7월 열리는 이 축제는 1978년 복원사업과 함께 시작해 올해 39주년이 된다. 축제는 그라피티가 중심이다. 축제는 예술가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부른다. 예술가와 일반 사람들은 그림과 낙서에 열중한다. 낙서가 그렇듯, 그라피티는 아름다운 그림이라기보다는 그림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소통과 마찬가지로 그라피티도 주변 환경을 먼저 받아들이고 어울린다.

벽화는 아실라의 미래를 밝혔다. 아실라에서 부산에 맞는, 부산의 그라피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병욱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