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심에서 1㎞ 거리에 있는
- 160년 넘은 해글리 공원
- 경마장과 대중스포츠 경기
- 박람회와 콘서트가 열리고
- 열대 식물원과 박물관도 있어
- 부산시민공원도 이처럼 훌륭한
-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잡길

지난해 10월 29일 부산역 광장에서 시작된 촛불집회가 올해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로 133일의 드라마로 막을 내렸다. 드라마는 집회 참가자들이 동구 고관로 '평화의 소녀상'을 붙들거나 남구 자유평화로를 걸어가면서 자유와 평화를 애타게 기원하는 것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카메라의 앵글은 참가자들이 곧 스러질 육신을 자유와 평화를 향한 열망으로 일으켜 세워 연산동 교차로에서 멈추었다가 다음 날 법원에 하소연하러 가는 것에 맞추어졌다.

드라마의 첫 장면은 부산역 광장이다. 시민들은 혼자이거나 여럿이서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면서 광장의 무대 앞, '아고라'(대중의 집회와 토론이 이뤄지던 고대 그리스의 광장)로 집결한다. 서로 공감을 나누며 참가자들은 대열을 갖추어 한목소리 외치면서 질서정연하게 대규모 집회를 여는 광장인 '포럼'(고대 로마의 공공 집회 광장)에서 거리로 행진한다.

크라이스트처치 해글리 공원의 분수대. 이 근처에 캔터배리 박물관이 있다.

■정원의 도시를 상징하다

아고라와 포럼은 기원전 9~7세기부터 시작된 정치 경제 사회의 중심 공간, 당시 시민들의 복합문화공간이다. 오늘날 아고라와 포럼 그리고 그 이름을 바꾼 '광장'도 역사적 기념 장소로 남아 있을 뿐이다.

아고라와 포럼처럼 복합문화공간의 역할을 하는 곳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 규모가 크든 작든 집회의 장소를 대도시 광장에 물려준다면, 자연이나 생태환경의 공간 역할도 할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유럽 이주민이 중심인 국가로서 유럽의 전통을 간직한 채 새로운 나라로 독립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2010년, 2011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된 경험이 있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곳은 해글리 공원(Hagley Park)이다. 해글리 공원은 역사, 문화, 자연, 생태·환경을 아우르는 곳이다. 해글리 공원을 만나면 크라이스트처치를 왜 '정원의 도시'라고 부르는지를 알게 된다.

캔터베리박물관에 전시된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옛 집.

공원으로 가기 전 여행자들은 지진이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심정으로 도심으로 발길을 돌린다. 아직 복구도 되지 않은 대성당의 울타리에는 '시와 시민 간의 의견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공사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공고문이 붙어있다. 그 성당 광장의 건너편 캐셜 거리에 있는 '리 : 스타트 몰'은 그 이름처럼 복구를 시작했음을 알리고 있을 뿐이다. 임시 건물의 상점들, 거리 장식들, 거리 조각상이나 그라피티 등은 복구의 완성을 향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행인들에게 상상력으로 채워주기를 바라고 있다.

■160년 넘는 공원, 시민과 호흡하다

마오리족의 지도자 그림.

도심에서 해글리 공원까지는 채 1㎞도 되지 않는다. 그 사이를 옥스퍼드 테라스(Oxford Terrace)로 이름 붙인, 에이번 강변에 있는 '기억의 다리'가 이어주고 있다. 다리의 입구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아치형 건축으로 되어 있다. 그 다리를 건너서 롤스턴 거리로 따라가면 에이번 강이 활처럼 감싸고 흐르는 아처리 론(Archery Lawn)과 그 잔디밭을 다시 양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해글리 공원이 나온다.

해글리 공원은 1855년 '대중의 휴식과 오락을 위한 열린 공간, 대중 공원으로서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것'으로 건립된다. 공원은 경마장에서 출발해 시민이 널리 즐길 수 있는 스포츠 경기나 산업박람회, 서커스, 꽃 전시회, 콘서트 등이 열리는 대중 공간으로 자리 잡아간다.

단순한 오락공간을 탈피하고자 공원에 이어서 열대 식물원(1863년), 캔터베리 박물관(1867년) 등이 건립된다.

해글리 공원의 추모 건축물, 기억의 다리.

공원에 이어져 있는 열대 식물원은 단순히 감상자로 머물러 있던 구경꾼들을 자연이 깨끗이 보존된 생태·환경으로 이끌고 간다. 은발의 노신사는 무한궤도 전동차를 운전하면서 승객들에게 열대 식물의 종류, 성장 환경, 특성 등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사진 찍기 좋은 곳을 안내하기도 하고 직접 찍어주기도 한다. 열대 식물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상록 활엽수, 덩굴 식물, 착생 식물, 낙엽수, 작은 관목, 선인장류 등이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노신사는 승객들을 '세계평화의 종'으로 데리고 가서는 '기억의 다리'를 다시 생각하게끔 하고는 해마다 2월 열리는 '정원 축제'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문득 생각난 부산시민공원

열대 식물원은 캔터베리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박물관은 마오리족을 비롯한 원주민과 이주 정착민들의 생활상을, 남극 탐험의 역사 그리고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새 키위(kiwi)와 멸종한 새 모아(moa) 등 조류 박제 등을, 지역의 자연적 환경과 생존 방식, 그 과정과 함께 이어져 온 예술작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을 나오면 분수대를 중심으로 갖가지 꽃들과 넓은 잔디밭으로 된 휴식의 공간이 기다리고 있다. 휴식을 취하고 피곤함이 가셔도 해글리 공원처럼 스포츠 경기장, 식물원, 박물관, 극장, 문학관, 예술 전시관 등 공원에서 복합문화공간을 만났던 행운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부산시민공원은 언제 어떻게 복합문화공간으로 시민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줄까?

민병욱·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