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남로터리에서 북쪽으로
- 쭉 뻗은 도로가 우장춘로
- 길 따라가면 '우장춘 기념관'
- 일본서 육종학의 일가를 이루고
- 해방이후 이곳에서 연구하며
- 한국 식량난 해결에 기여했다

- 효자와 도깨비 전설 품었던
- 산저마을·장수바위 있던 곳엔
- 70년째 고아들 보살펴온
- 양육시설 새들원이 자리잡아

■美南 혹은 尾南

도시철도 3호선은 수영역에서 대저역까지 부산의 동서 지역을 오간다. 미남역은 3호선에서 가운데 위치한 역사이며, 부산 지도를 봐도 중앙에 있다. 이곳을 통과할 때면 미남의 뜻이 자못 궁금해진다. 한문으로 미남(美男)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미남(美南)이 정답이다. 조선시대 동래읍성에서 살펴보면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건만, 왜 아름다운 남쪽이란 의미를 가졌을까. 옛 문헌에서는 美南과 미남(尾南)을 혼용해 썼다고 한다. 아름다운 남쪽이든, 꼬리의 남쪽이든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그건 미남역에서 지상으로 나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미남역에서 바깥으로 올라오면 부산의 진산(鎭山)인 금정산이 시선을 끈다. 저 멀리에는 금강공원에서 출발한 금강케이블카가 천천히 레일을 타고 올라간다. 그렇다. 미남은 금정산 자락에 기댄 이름이다. 산자락의 남쪽이든, 산맥의 꼬리이든 모두 금정산이 빚어낸 지명인 것이다. 3번 출구에서 100여 미터만 더 가면 부산에서 가장 혼잡한 교차로와 마주친다. 미남 로터리다. 이곳은 충렬대로, 아시아드대로, 우장춘로가 만나는 교차로다. 만덕터널을 통과하려는 차들이 몰려들어 상습적으로 교통정체가 되는 구간이다.

1973년 준공된 제1만덕터널은 동래와 구포 간 교통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줬다. 만덕터널이 건립되기 전에 부산사람들은 걸어서 만덕고개를 넘었다. 금정산과 백양산이 허리를 굽히고 접하는 만덕고개는 금정산맥에서 그나마 낮은 산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고갯길이 형성되었는데, 만덕고개는 동래 장사꾼들에겐 넘기 힘든 고개였다. 무거운 짐을 지고서 고개를 넘는 일도 어려웠지만 금정산에서 숨어 지내는 도둑들에게 애지중지하는 상품을 강탈당하기 일쑤였다. 그러하니 만덕고개의 도둑들을 단박에 물리친 '빼빼영감' 이야기는 동래와 구포를 오가는 보부상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줬을 게다.

■개발 아래 미남 당산

아동양육시설인 새들원. 마산 출신의 고 안음전 여사가 세웠다.

제1만덕터널이 뚫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구포나 김해를 왕래하는 동래 주민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다. 잇따른 도시개발로 인해 온천동 인구가 증가하고, 만덕터널을 통과하려는 차들이 몰려들어 매일같이 교통 혼잡이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1988년에는 바로 옆에 제2만덕터널을 건립하였다. 하지만 쌍굴이 된 만덕터널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감도 곧 거품처럼 사라졌다. 버스를 타고 북구로 출근하던 주민들에 따르면 새로 뚫린 만덕터널을 넘는데 50여분이 소요되었다. 동래구와 북구의 동시다발적 도시개발과 아파트 건립으로 인해 만덕터널을 통과하는 대중버스는 그야말로 생지옥의 만원 버스였다. 2005년 개통된 3호선의 미남역이 주민들에게 반가운 것은 이런 까닭이리라.

3호선 미남역은 4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환승역이다. 3, 4호선이 이어지는 미남역은 지하연결로가 꽤 길다. 4호선 미남역 9번 출구로 나오면 고층 아파트 신축 현장이 버티고 있다. 목 좋은 교통로인 미남로터리는 이렇게 늘 개발 중이다. 하지만 전통문화는 숨을 쉬고 있다. 9번 출구 앞에 팽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미남본동 당산나무다. 1980년에 이미 수령 250년을 기록해 부산시 보호수로 지정됐다.

미남역 9번 출구 앞에 우뚝 서 있는 당산나무.

미남본동 마을 주민들은 이 당산나무를 신처럼 위했다. 정월 대보름이 돌아오면 제관을 선정해 빠짐없이 제사를 지냈다. 당산나무의 나이는 마을 역사이기도 했다. 현재 온천3동 파출소 동쪽 일대에 미남본동 마을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증거물이다. 이곳은 만덕고개를 넘는 주요 교통로이므로 예전부터 자연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리라. 이 마을에는 이 씨, 김 씨, 박 씨, 문 씨 등이 주로 살았으며 자식들이 어른이 되면 막걸리를 대접하고 성년식을 치르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한다.

미남본동 마을 외에도 과거 미남역 주변에는 산저, 포전 등 여러 자연마을이 존재했다. 미남역 일대는 행정구역상 온천2·3동에 해당된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 높은 산맥이 뻗어있지만 동쪽으로는 넓은 평야와 온천천이 흐르고 있다. 과거에는 논밭이 많았으며 백성들의 대부분은 이 땅에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농사꾼이었다. 그 흔적이 포전마을의 지명에 있다. 미남초등학교 일대에 있었던 포전(浦田)은 '개밭'이란 뜻이다. 그래서 '개밭 마을', '개밭등 마을'로도 불렸다.

산업화 시기에 광활한 개밭은 개발하기 좋은 입지로 여겨졌다. 주택단지와 교통시설이 급격히 들어서고 풍경이 자주 바뀌었으니 옛 자연환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산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던 자리에 다시 고층 아파트가 건립된 것도 그렇다. 미남역 일대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현주소다.

■우장춘 박사의 꿈

우장춘 박사 기념관 앞의 우장춘 유적지와 자유천(慈乳泉).

미남 로터리에서 북쪽으로 쭉 뻗은 도로가 우장춘로다. 우장춘로를 타고 금강식물원으로 가다보면 중간에 지하차도가 나온다. 이곳 입구 오른쪽에 있는 2층 회색건물이 우장춘 기념관이다. 그의 기념관이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기념관은 우리나라 원예시험장이 있던 자리다. 원예시험장은 현재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의 전신으로서 이곳에 있다가 수원으로 옮겨갔다. 우 박사는 일본에서 귀국해 초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을 역임하였으며, 영면에 들기 전까지 이곳에서 자신의 꿈을 펼쳤다.

우장춘 기념관은 작고 소탈한 공간임에도 그의 꿈과 일대기가 잘 요약된 강소(强小) 전시관이다. 기념관은 우장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99년에 건립되었다. 전시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우장춘 박사의 학위기이다. 그는 1936년 '유채 속의 게놈분석'이란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 박사는 1898년 조선인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나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된 무신(武臣)으로 일본에 망명한 인물이었다. 이런 사실은 평생 우 박사의 마음을 괴롭혔을 것이다. 아버지가 일찍 숨진 이후에 어린 우장춘은 가난한 환경에서 고생을 했거니와 일본 학생들로부터 '조센징'이라며 따돌림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히로시마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우장춘은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에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의 기술자로 일했다. 육종학자로서 큰 포부를 가졌던 그는 실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세계가 주목한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장춘 기념관.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농업전문가 초빙에 무진 애를 썼다. 대표적인 것이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위원회'를 만들고 한국농업과학연구소까지 창설한 사례였다. 이에 감동을 받은 우 박사는 1950년 3월 환국하였는데, 당시 환영식에서 '아버지 나라인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이 나라에 뼈를 묻을 것을 약속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말은 공언이 아니었다. 입국 직후부터 농촌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며 채소 품종 개발에 착수했다. 무와 배추의 종자 생산에 성공했으며, 씨감자 원종을 생산 보급했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으로 우 박사를 생각하지만, 실은 우리나라의 농업 생산이 시작될 수 있도록 첫 번째로 씨를 뿌려 토대를 닦은 인물이 바로 우장춘이었다.

기념관 앞에는 '우장춘 박사 유적지' 비석과 '자유천(慈乳泉)' 비석이 있다. 자유천은 우 박사가 지은 이름으로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라는 뜻이다. 그는 아버지 나라에 돌아왔지만 외롭고 힘들었다. 홀로 지내는 낯선 땅에서의 고독도 그러했지만 1953년 어머니까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그는 대신 원예시험장에서 위령제를 지냈고, 각계에서 보내준 조의금으로 우물을 팠다. 그 우물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자유천이라 명명한 것이다. 우 박사는 농업기술 개발과 후진 양성에 매진하다 귀국 후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1959년에 운명했다. 그는 귀국 때의 약속을 지켰지만 그가 품은 원대한 꿈을 다 이뤘는지는 알 수 없다. 기념관 인근에는 농업생명산업을 주도하는 원예인을 키우고자 설립한 동래원예고등학교가 있다. 이곳에서 우 박사의 못 다한 육종과 농업생명산업의 꿈을 이루는 후학이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사라진 산저마을과 장수바위

우장춘 기념관 남쪽에 있는 사거리가 산저 교차로다. 이 교차로를 따라 올라가면 금정마을 입구에 도착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현 금정마을 근처에 산저(山底)마을이 있었다. 산저는 '산밑'이란 뜻으로 금정산 아래에 있는 동네였다. 이 마을에는 돌복숭아가 많이 재배되었으므로 도화촌(桃花村)이라고도 불렸다. 봄이 오면 산저마을은 분홍빛 돌복숭아꽃이 만발하는 아름다운 꽃동네였으리라.

장수(長壽)바위는 산저마을 인근의 유명한 바위였다. 이 바위에는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신 효자 전설이 전해진다. 바위 근처에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아들은 백일기도를 올리면 아버지의 병이 낫는다는 어느 도사의 말을 믿고 매일 장수바위 아래에서 목욕을 한 뒤, 현 동래럭키아파트 자리에 있던 돌탑까지 내려와 기도를 올렸다. 99일이 되던 날 무서운 도깨비가 나타나 달려들었으나 아들은 도망가지 않고, 기도를 계속 드렸다. 드디어 100일이 되자 대장 도깨비가 나타나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주면서 말했다. "한 번도 쉬지 말고 네 집까지 이 관을 지고 가거라. 내일 아침 이 관을 양지 바른 곳에 묻어두면 네 아버지의 병이 완쾌될 것이다." 아들은 그 말대로 무거운 관을 진 채 쉬지 않고 집까지 간 뒤 쓰러져 버렸다. 다음날 아침 관을 묻기 위해 열어보니 이게 웬일인가. 약병 두 개와 황금이 가득 들어있는 게 아닌가. 약을 드리자 아버지는 병이 씻은 듯 나았고 오래오래 살 수 있었다. 게다가 황금 덕택에 부자가 되어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산저마을과 장수바위는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 위에는 주택과 빌라, 음식점, 그리고 새들원이 들어섰다. 새들원은 부산의 대표적 아동양육시설이다. 새들원은 기독교의 사랑과 봉사정신으로 어려운 환경의 아동을 키우고자 1946년 중구 대청동에 처음 건립됐다. 설립자 안음전 선생은 마산 출신의 여성 사회사업가로 일제강점기 만세운동에도 참여했으며, 동경보육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에서 보모로 일했다. 결혼 후 남편과 만주로 간 안 선생은 해방이 되자 고국에 돌아와 부산에 정착했다. 안 선생은 부산항 주변에서 떠도는 고아들을 데려와 보살폈고, 적산 가옥을 구입해 부산 최초의 고아원인 새들원을 세웠다. 1952년에는 지금의 온천동 자리에 건물을 신축해 옮겨왔다. 이후 금정산 자락의 새들원은 불쌍한 아동들에게 새 희망과 큰 꿈을 키워주는 양육시설로 성장했다.

새들원에서 아래로 내려와 쇠미로를 건너면 온천2동의 재개발 현장이 펼쳐진다. 빌라와 주택단지의 온천동은 철거와 개발의 틈 속으로 신속히 사라지고 있다. 미남역에서 내려 온천동의 역사를 찾는 일은 숨은 그림찾기가 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미남교차로 앞에 당산나무가 숨 쉬고 있고, 지하차도 옆에 우장춘 박사의 유적지가 살아 있어 다행이다. 금정산의 아름다운 남쪽(美南) 문화를 보려는 사람들은 사뭇 미남역에서 내릴 수밖에….

류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공동기획: 동서대,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