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판사로서 부끄러운 수준입니다. 놀랍고도 참담하네요."

사진=법원, 연합뉴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등 사법행정권 남용 파동으로 내홍을 앓는 사법부가 법원 내부망 '코트넷'에 신설된 익명 게시판으로 또 다른 진통을 겪고 있다.

최근 사태를 두고 판사들의 주장이 양분된 가운데 서로를 향한 비방과 인신공격 등 낯뜨거운 말이 익명게시판을 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달 생긴 익명 게시판엔 전국 대표판사 100명의 '전국법관대표회의' 이후 하루에도 게시물이 수십 개씩 업데이트 된다.

문제는 이번 파동을 두고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향한 비방과 실명 거론, 조롱이 도를 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지난 19일 회의에서 '거수기가 되기 싫다'며 회의 진행 방식에 반발한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익명 게시판에서 일방적인 뭇매를 맞았다.

'까마득한 후배'를 자처한 한 판사는 "어찌 '만연히' 그렇게 오셔서 준비 부족을 자인하는 말씀을 당당히 하시는 것인지 안쓰럽다"며 비아냥댔다.

이번 사태를 촉발한 이규진(55·사법연수원 18기)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고법부장판사)을 향해서도 "한가하실 텐데 내 밑에서 재판연구원이나 하시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양승태 씨'라고 직함을 떼고 부르는 글도 있었다.

결국 김창보(58·15기) 법원행정처 차장이 나서 "민형사상 문제가 될 수 있는 글을 자제하라"고 게시판에 공개 경고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연출됐다.

익명 게시판이 생긴 것은 법원 내부망이 출범한 2000년 이후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까진 불만이나 제안이 있어도 실명으로만 글을 쓸 수 있었다.

법원은 보수적인 조직인 만큼 오프라인에서도 판사들이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밝히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드문 일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익명'게시판이 생기자마자 이런 상황이 터져나오는 데 대해 판사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분위기다.

곪을 대로 곪던 것이 마침내 터졌다는 시각도 있다.

예의 경직되고 보수적인 조직 분위기에서 억눌려오던 구성원들의 요구와 불만이 익명게시판을 플랫폼 삼아 터져나왔다는 것이다.

한 부장판사는 "판사도 사람안 만큼 현안에 대한 분노가 표출될 수는 있다"면서도 "좀 더 건전한 토론을 기대했는데, 이런 상황은 안타깝다"고 전했다.



김민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