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 가누기도 어려운 강한 바람을 뚫고 걷는 바람의 도시 해변 길

- 마오리족의 전설이 깃든 조각작품이 다리가 되고
- ‘쿠바의 거리’ 이정표엔 역사 인물·선박명 달려
- 명찰 단 의자 하나하나 앉았다가 인물 사연이

뉴질랜드 남 섬의 북동쪽에 있는 카이코라에서 강진(7.8)의 여진으로 도로와 건물이 붕괴되고 있다는 뉴스를 뒤로 한 채 뉴질랜드로 출발하여 2017년 음력설 무렵 웰링턴에 도착했다. 오세아니아 배낭여행자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YHA(유스호스텔협회)에 여장을 풀고 챙겨 본 안내 메모판에는 해변 길 걷기, 쿠바 거리, 열대식물원 등이 추천되어 있었다.

웰링턴이 바람의 도시라는 별명을 확인시켜주는 듯, 해변 친수공간에서 만나는 것은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게 하는 강한 바람, 곧 덮칠 듯 으르렁거리면서 밀려오는 파도, 그 속에서도 엎드려 잠든 듯 아무런 말도 없이 마냥 숨어있는 옛이야기들이다.

웰링턴 열대식물원에 있는 벤치에는 이 벤치를 기증한 사람의 신상과 사연을 기록해 놓았다.

■마오리족 옛 이야기, 예술이 되고

원주민 마오리족의 옛이야기는 지역 출신 조각가 톰프슨(Rewi Thompson, 1953년생)의 조각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이 전해준다. 마오리족인 그 조각가는 작품 이름 ‘Te Aho a Maui’(마오리족의 낚싯줄, 1991년 제작)에서부터 마오리의 창조 신화를 빌려 온다. 그의 작품을 지나 바닷가로 가까이 다가가면 쿠티(Kooti, 마오리 군사지도자와 예언자)가 사용한 별과 달, 산의 모양을 형상화한 깃발을 단 금속 막대기가 여기저기 꽂혀 있다. 그 막대기들은 저물 무렵 지는 해와 떠오르는 달의 배경으로 설치되어 ‘아!’라는 탄성을 저절로 자아내게 하는 석양의 풍경을 화폭으로 담는다.

마오리족의 옛이야기와 삶의 흔적은 친수공간과 시청 광장을 이어주는 ‘시티로 가는 바다 다리’에서도 짙게 베어난다. 그 다리에는 1994년 세 명의 조각가, 톰프슨(Rewi Thompson), 매칫(Para Matchitt), 그레이(John Gray)가 마오리족의 전설에 따라서 제작한 세 개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그 작품은 도시의 옛 이름 ‘테 우포코 오 테 이카(Te Upoko-o-te-Ika, 마오리 낚시의 중심지)를 창조한 신의 모습을, 종족의 조상으로 섬겼던 도요새 쿠아카(Kuaka, 큰 뒷부리 도요새)와 후아후(Huahou, 붉은 가슴도요)를, 고래, 상어 및 물고기들을 조각한 것이다.

■거리의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웰링턴 해변 친수공간 거리의 조형물. 마오리족 군사지도자가 사용한 별, 달, 산 등의 모양을 담았다.

해안 친수공간을 따라 길을 걷다가 지쳐서 쉬고 싶을 때, ‘쿠바 거리의 입구’라는 팻말이 망설이지 말고 어서 오라고, 이제 옛이야기에서 나와 작금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손짓한다.

그 팻말은 쿠바 거리가 쿠바인들의 거리가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웰링턴이라는 지명이 유럽 백인이 정착하도록 도움을 준 웰링턴 공작 1세, 해변에서 쿠바 거리로 올 때 가로지른 웨이크필드 거리가 1839년 9월 20일 이곳에 도착한 토리 호의 선장 웨이크필드 대령의 이름을 빌려온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팻말은 거리 이름을 단 채 방향만을 가리킬 뿐이다. 그 거리 이름은 글렌버비(Glenbervie), 록스버러(Roxbuugh), 볼튼(Bolton), 애들레이드(Adelaide), 오리엔탈(Oriental), 코로만델(Coromandel), 쿠바(Cuba) 등이 1840년 1월 이후 유럽 이주민들을 태우고 온 선박의 이름을 빌려온 것임을 스스로 말한다. 그 거리는 1993년 제정된 ‘역사적 장소’에 관한 법률에 따라서 역사적 장소로 지정되어 있다.

■웰링턴 열대 식물원을 만나다

쿠바 거리 입구의 건물에 그려진 그라피티.

쿠바 거리는 역사적 장소를 중심으로 극장과 예술 스튜디오, 개인 갤러리, 카페와 커피숍, 식당과 시장 등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그 사이에 있는 좁은 골목길은 그라피티가 장식하고 있다. 거리에 늘어선 건물과 골목의 그라피티들은 1840년 정착민이 살고 갔던 삶의 흔적을 여기저기 드러내고 있다.

쿠바거리에서 다시 웨이크필드 거리로 나와 케이블 거리를 따라가면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식물원으로 갈 수 있다. 그 공식 명칭인 ‘웰링턴 열대 식물원’은 뉴질랜드의 ‘원예, 역사 환경 신탁 유산 지역’이다. 부산 시민공원의 절반 정도의 면적을 가진 열대 식물원의 안내지도를 따라 가다가 지치고 피곤할 때 곳곳에 마련된 의자는 휴식의 시간을 가져다준다. 앉으려고 허리를 숙여 먼지를 터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의자의 명찰이 붙어 있다.

■의자 하나에도 깃든 삶의 숨결

의자 하나에 하나씩 붙은 명찰은 앉았다가 간 사람들의 이름과 간단한 사연을 보여준다. ‘찰스 아서 카펜터의 사랑을 기억하며- 1906년 8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났고 1981년 3월 17일 웰링턴에서 살다가 죽었다. 딸 엘리자베스 클라크와 그 가족들이 기부했다.’ ‘케빈 우함의 사랑을 기억하며- 식물원의 걷기를 사랑한 사람, 1940년 7월 30일~2005년 2월 21일.’ ‘바질 1999~2011, 직원들과 방문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은, 공원에서 입양한 고양이, 웰링턴의 친구.’

의자 하나에도 방문객과 이웃, 아니 생명체의 삶과 역사가 짙게 스며들어 있어 공원을 나와서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 곳은 웰링턴이 처음이다.

바람의 도시 웰링턴에서 부는 바람은 스쳐 지나가면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부산에서도 길거리와 공원의 의자 하나에 도시의 역사와 시민 삶의 흔적이 짙게 묻어나게 할 수는 없을까?

민병욱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 bmw@pusa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