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경남 통영시 도산면 한퇴마을회관의 옛 구판장. 마을주민 김영갑(82) 씨가 주인도 없는 가게의 냉장고 문을 열고는 시원한 막걸리 한 병을 꺼내 들이킨다. 그런 후 1300원을 냉장고 옆 돈 바구니에 알아서 넣는다. 냉장고 앞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고 ‘계산은 돈 바구니에, 거스름돈은 알아서 가져가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있다. 돈 바구니에는 1000원권 지폐와 500원·100원 동전이 가지런히 쌓여 있다. 이내 마을 주민 3명이 가게로 들어와 냉장고 안에 있던 음식을 마음대로 꺼내 먹으면서 즐겁게 수다를 떤다.

이 구멍가게는 옛 구판장을 무인 양심가게로 전환해 24시간 운영 중이다. 한퇴마을은 130가구 280명이 거주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고령자가 많은 곳이다. 마을회관에 딸려 있던 구판장은 3년 전 장사가 안 돼 접었다. 마을에서 임대를 줬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구판장이 문을 닫자 이곳에 삼삼오오 모여 여가를 즐기던 소소한 일상의 추억이 사라졌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농촌이라 간단한 요기 해결도 불편했다.

심금석(70) 마을 이장 등 주민들이 모여 무인 가게를 운영하자고 논의했다. 구판장은 이렇게 되살아났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한퇴마을 양심가게’로 불린다. 1800원 짜리 맥주를 마신 주민은 안주로 마른멸치 몇 마리를 공짜로 먹은 대신 2000원을 두고 잔돈을 챙겨 가지 않는다. 먹고 난 잔은 알아서 씻고, 남은 쓰레기 등 가게 청소도 알아서 정리한다.

양심가게 운영 후 마을에는 활력이 더 넘쳐나고 있다. 운영수익보다는 고된 농사일에 지친 마을 주민의 쉼터를 지향하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 잔치 등으로 남은 음식은 양심가게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나눠 먹기도 한다. 박현철 기자 phcnew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