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벌세력·친인척을 멀리한 의종
- 충신도 내치며 스스로 어둠 속으로
- 왕의 속내를 안 정함·김존중 무리
- 조정의 굵직한 사안들까지 농단

- 정서도 역모죄로 조사받는 등
- ‘서대 사건’ 분풀이 대상이 되고…

어둠이 두려운 것은 나아갈 곳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유학은 그런 어둠에서 벗어나 나아갈 길을 밝히는 학문이다. 임금된 자는 응당 자기가 먼저 나서서 나라의 앞길을 밝혀야 하고 신하들을 통솔해 나아가야 한다. 한데 지금의 주상은 어떠한가. 학문을 멀리하면서 스스로 어둠 속에 갇히려 하지 않는가. 정서(鄭敍)는 눈을 들어 어둠이 짙어지는 대문을 또다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주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간 올해 안으로 책거리라도 할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서경이 어떤 책인가. 어진 정치를 베풀기 위한 공부 중의 공부가 아니던가. 즉위한 지 얼마나 됐다고 잔치와 격구에만 빠져 지내다니. 주상은 귀도 없단 말인가. 왜 궁궐 내에 쫙 퍼진 소문을 듣지 못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환관 하나가 우쭐우쭐 뜰로 들어섰다. 그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대충 짐작이 갔다. 왜 주상은 모시지 않고 혼자 왔느냐? 나으리, 폐하께서 몸이 좋지 못하셔서…. 그런 양반이 격구까지 구경하셨다는 게냐? 저는 다만 일찍 자리에 누우셔야 한다고 내전숭반께서 전하라 하시길래…. 뭐라, 내전숭반이? 예, 그러하옵니다. 정서는 어이가 없었다. 정함이 이제 폐하의 발걸음마저 막다니. 그렇지 않고서야 철석같이 약속하고 왜 오지 않는단 말인가. 정함이 이렇게까지 전횡을 일삼을 줄 몰랐다. 어릴 적부터 주상과 이어진 인연과 주상을 길러준 유모까지 아내로 삼았으니 주상의 총애를 입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랬으니 환관의 최고직인 내전숭반에까지 오르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주상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걸 마치 제가 가진 권세처럼 날뛰다니. 가서 냉큼 이르거라, 지금 당장 주상을 뵈러 간다고!

궐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의종은 이미 점술과 도참설에 의지해 국정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한 나라의 임금이 그런 주술에 의지해 정사를 펼쳤다가는 나라를 망치기 십상이다. 정서는 그런 주상이 걱정이었다. 그는 작정한 듯 주상의 침실로 잰걸음을 쳤다. 그런데 침실에서 나오는 김존중과 맞닥뜨릴 줄이야. 아니, 아직까지 퇴청하지 않으시다니 주상에게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소? 정서는 자신도 모르게 쏘아붙이고 말았다. 내시낭중이야말로 무슨 일로 이 야밤에 어찌 이곳까지 납시었소? 김존중도 빈정거리며 되받아쳤다. 정서의 이맛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생각 같아서는 정함과 노닥거리는 행태를 나무라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일이 있으니 왔지 대감처럼 일 없이 왔겠소? 어허, 말이 좀 심합니다, 주상의 이모부면 체통은 지키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언제부터 대감이 주상의 친인척 관리까지 맡으셨소? 김존중이 무안한지 얼른 헛기침 몇 방을 입 밖으로 쏟아냈다.

정서는 그런 김존중을 실눈으로 째려보았다. 예전의 정함이 아니듯 김존중 또한 예전의 김존중이 아니었다. 김존중 또한 폐하가 어릴 적에 글자공부를 시킨 적이 있었다. 그런 인연을 폐하가 잊지 않고 있다가 그를 높은 자리에 발탁한 것이다. 그랬더니 정함과 작당을 해 조정의 굵직한 사안들까지 자기들 입맛에 따라 농단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변해가자 모두 경계하는 눈치들이었다. 어떤 치들은 발 빠르게 정함과 김존중한테 줄을 서기까지 했다. 주상의 침실에서는 끝없이 껄껄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정함과 김존중이 득세한 것은 인종의 빠른 죽음이 하나의 원인이기도 했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인종이 죽자 그의 아들 의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의종은 즉위하자마자 문벌세력과 친인척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태자 신분으로 부친이 묘청과 이자겸의 난까지 겪는 것을 지켜봤으니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문제는 그런 왕의 속내를 알고 정함과 김존중이 이를 악용한다는 거였다. 난세입니다, 이런 판국에 정습명까지 죽고 말았으니, 원. 말을 꺼낸 이는 거푸 술잔을 꺾어대던 정서의 처남 임극정이었다. 임극정은 성정이 소같이 순해 다들 믿고 따르는 양반이었다. 그런 임극정이 이 같은 넋두리까지 내뱉는다는 건 그 정도로 조정의 기류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말일세, 그렇다고 ‘자진’까지 하시다니 이런 변고가 또 있겠나. 정서가 화답했다. 이 모든 건 주상의 잘못입니다, 갸륵한 충신의 뜻을 헤아리기는커녕 모리배 말만 듣다니요. 임극정이 다시 말했다. 그게 어디 주상 탓인가, 정함과 김존중 같은 놈들 때문이지. 정함 무리들이 나라를 망치기 전에 바로잡아야지요. 오늘도 주상을 찾아갔었다네, 그런데 당최 들으려 하지 않으니 어쩌겠나. 정서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사실 정습명이야말로 장소를 불문하고 의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인종 또한 습명의 그런 강직함을 알았기에 숨을 거두기 전에 부탁했을 것이다. 의종이 어진 임금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이다. 의종도 이런 부친의 뜻을 알고 즉위 초까지는 습명과 함께 국정을 의논하곤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의종은 슬슬 습명을 피하기 시작했다. 피곤할 정도로 고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상은 습명을 멀리했고 이를 알아챈 정함 일당은 주상과 습명 사이를 이간질해댔다. 견디다 못한 습명이 병을 핑계대어 사직을 청하고 말았다. 그러자 주상은 습명이 물러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 김존중을 앉혀버렸다. 그러니 충신이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누를 끼치는 일이라면 기꺼이 없어져 주겠다며 자진해버린 것이다.

주안상에 둘러앉은 이는 정서와 임극정 외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바로 대령후 경이었다. 경은 부러 대화에 끼지 않으려고 두 눈을 감은 채 잠자코 있었다. 괜히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가 형에게 누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형이 태자일 때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진 적이 있었다. 형의 게으른 공부와 놀기 좋아하는 성품 탓이었다. 모친 공예왕후는 화가 난 나머지 차남인 경에게 왕위를 넘겨야 한다면서 부친 인종을 설득하고 나섰다. 하지만 인종과 정습명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고 말았다. 하마터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을 형이었기에 마음먹기에 따라 형이 자신의 목을 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대령후 경으로서는 몸가짐을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된 것은 모친 때문이었다. 모친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생일에 어찌 가만있겠냐면서 선물꾸러미를 안기며 그의 등을 떠민 것이다.

	부산 망미동 정과정(鄭瓜亭)공원 내 정과정곡 비.

대령후 경과 같이 정서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공예왕후까지 대령후를 축하사절단으로 보내주니 이에 걸맞은 격식을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바람에 악공까지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악공을 부른 것은 아내보다는 대령후를 위한 마음이 더 컸다. 대령후의 경우 거의 바깥 출입이 없었으니 이모부로서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서둘러 마련한 잔치였지만 흠잡을 데는 없었다. 그랬는데 밤이 깊어지면서 하나둘 자리를 뜨자 기다렸다는 듯이 임극정이 그만 시국을 술상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 바람에 그는 계속 대령후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대령후는 좌선에 든 스님처럼 묵묵히 앉아 있었다.

정서가 매형 이작승을 맞이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그날따라 감기 기운도 있고 해서 일찍 내시원을 나와 집에서 쉬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작승이 허겁지겁 달려와 하는 말이 그의 눈을 화등잔 만하게 만들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어사대에서 자신을 조사한단 말인가. 조사 내용도 믿어지지 않았다. 대령후 경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역모를 꾸몄다니. 그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그런 있지도 않은 말을 했답디까? 산원 정수개가 주상에게 직접 아뢰었다는구먼. 정수개라니, 저와는 교분도 없는 사람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반역죄로 몰았단 말입니까? 글쎄, 나도 그게 수상해서 처남을 찾아온 길일세. 정수개야말로 정함과 한 집안사람이니 필시 그런 일을 꾸몄을 수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정서의 턱이 부르르 떨리고 어금니에 힘이 절로 실렸다.

다행히 반란을 꾀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죄 없는 사람을 고자질한 정수개는 얼굴에 문신까지 새겨 넣는 형까지 받은 후 흑산도로 유배를 가야 했다. 하지만 뒤에서 조정한 정함은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되레 외척과 조정신하들이 정서와 대령후의 집을 수시로 들락거렸으므로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사태가 이상하게 꼬이고 말았다. 하긴 정함조차도 일이 꼬일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서대 사건’에서 촉발된 분을 어떻게 좀 풀어볼까 하고 저지른 일일 수도 있었다.

서대 사건이란 간추리면 대충 이러하다. 의종이 왕비를 궁주로 승격시키고 축하연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때 신하들이 잔치에 참석하려고 나가다가 정함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의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서대를 허리에 차고 있었던 것이다. 내시숭반 주제에 서대까지 한 것을 보자 관료들이 호통을 쳤다. 그런데 의종은 그런 정함을 나무라기는커녕 잔치가 파한 후 차고 있던 서대를 다시 정함에게 선물로 하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함을 어사대 관료로 승진까지 시켜버렸다. 그러자 조정의 신하들이 환관 중에 그런 직책을 맡은 이는 없다며 들고 일어났다. 결국 주상도 마지못해 어명을 거두기는 했다. 하지만 보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함이 생일잔치 모임을 빌미로 정수개를 꼬드겼던 것이다. (하편에 계속)

이상섭 소설가

※공동기획: 동서대,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