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리배 신하 협박에 넘어간 의종
- ‘역모죄’ 누명 벗은 정서 다시 압송
- 곤장 100대와 함께 동래 유배령

- 억울했지만 주상 믿기로 한 정서
- 정자 짓고 밭 일구며 하루하루 보내
- 밤이면 외로움에 임금 사모곡 짓기도

- 유배 19년째 무신란이 발생하고
- 주상마저 거제도로 유배 당하자
- 귀양서 풀려난 기쁨 대신 눈물만

사태는 그렇게 매듭이 되는 듯했다. 그런데 5월이 되면서 다시 불거지고 말았다. 질서 문란의 책임을 정서에게도 물어야 한다는 상소 때문이었다. 상소문이 올라오자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김존중이 나섰다. 여기에 김존중과 정함에게 줄을 대던 신하들까지 합세했다.
조정이 들끓으니 주상으로서는 고민일 수밖에 없었다. 반역을 꾸미지 않았으므로 죄를 물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신하들의 호소를 그냥 무시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주상은 마지못해 저간의 일을 다시 세세히 조사해 올리라고 명했다. 임금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부의 군졸들이 정서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누명을 벗어 안심하고 있던 정서에게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의 홍두깨인 셈이었다. 누가 시켰느냐? 정함이 나를 잡아오라고 시키더냐? 아니면 김존중이냐? 할 말은 병부에 가서 하시오, 우리는 그저 어명을 받들 뿐이오. 정서는 가족 앞에서 꼼짝없이 오랏줄에 묶여 압송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병부에는 이미 대령후 경을 모시던 사람들이 줄줄이 굴비두름이 되어 있었다. 그 속에는 악공도 끼어 있었다. 악공은 벌써 태형을 당한 후인지 아랫도리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음악이 좋아 악기를 타고 노래가 좋아 자리에 앉아 흥을 북돋웠을 뿐인데 그것이 죄가 되어 매를 맞고 유배까지 당하다니. 물론 그런 억울함은 정서도 매한가지였다. 곤장 100대와 함께 동래 유배령이 떨어졌으니 말이다. 폐하! 이건 너무 억울하오이다. 정함과 김존중이 나를 모함하여 참언한 것입니다, 통촉하여 주소서! 하지만 주상으로부터 아무 말이 없었다. 정서는 형틀에 묶여 곤장을 맞다가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좀 드시옵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방 안이었다. 부인 장흥 임씨는 얼마나 울었던지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부인, 대령후는 어찌 되었소? 대령후가 사는 집만 없애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답니다. 그제야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혹여 대령후의 목이라도 날아갔다면 저승에 가서 인종을 어찌 본단 말인가. 그러니 관직을 갖고 있던 처남과 매부들이 좌천된 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좌천의 이유가 잔치에 그릇을 빌려주어 신하의 체면을 구겼다는 점, 탄핵을 알면서 부러 대궐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 등 터무니 없었지만 관직을 잃지는 않았으니까. 신하이기에 왕명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법. 그것이 충이지 않은가.

그는 주상의 명을 받들기로 했다. 더군다나 주상이 직접 지금은 조정이 시끄러워 어쩔 수 없으니 잠시 가서 있으면 곧 부르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아내의 말마따나 맘 편하게 요양하는 셈치고 떠나면 될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를 모함했던 정함마저 파면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공정한 일처리이지 않은가.

해가 바뀌었지만 주상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파직한 정함을 주상이 다시 복직시켰기에 그의 실망감은 더욱 컸었다. 하지만 그는 주상을 믿기로 했다. 궐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시일이 조금 걸릴뿐, 주상이 약속을 어길 분이 아니니까. 그런 맘 덕분일까. 이왕 기다리는 거,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때마침 조정에서 권농책을 펼치고 있었다. 손수 땅을 개간한 사람에게는 경작권까지 인정해주고 세금까지 깎아준다니 관리로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는 동래 정씨 문중의 양해를 얻어 강기슭의 일부를 밭으로 일구었다. 그리고 그곳의 토질에 맞추어 오이를 심었다. 그런 다음 손수 정자도 지어 과정(瓜停)이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밤이면 몰려오는 외로움만은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밤이면 그는 거문고를 친구삼아 노래했다.

그런 어느 해 가을이었을 것이다. 동쪽 하늘에서 때 아닌 혜성이 나타났다. 불길함이 뇌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장인 임원후가 죽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당장이라도 올라가서 장인의 영정 앞에서 용서를 빌고 싶었다. 사위로서 역할도 못하고 아내마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죄가 너무 컸다. 하지만 영정 앞에 다가갈 수도 없는 몸이라 더 마음이 아팠다. 서둘러 하인을 개경으로 보내는 것으로 그의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하인의 손에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쥐어주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한데 한 달여 만에 돌아온 하인이 들려주는 말이 그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주상이 맨날 향락에 빠져 지낸다는 거였다. 그러니 정함 같은 모리배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수밖에. 오죽했으면 무인 최숙청이 횡포를 보다 못해 목을 베어버리고 싶다고 했다가 유배까지 가고 말았을까. 그럼에도 정함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의 앞일이 걱정이었다. 그가 주상의 곁에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거문고를 탔다. 후세 사람들이 ‘정과정곡’이라 부르는 노래였다.



내 님을 그리워하여 울며 지내나니

산 접동새와 내가 비슷합니다.

아니시며 거짓임을 아으

잔월효성이 아실 것입니다.

넋이라도 님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아으

뻐기던 이 뉘셨습니까?

잘못도 허물도 천만 없습니다.

슬프구나, 아으

님이 하마 나를 잊으셨습니까?

아으, 임이시여! 다시 들으시어 사랑해 주소서.



그렇게 유배지에서 보낸 세월도 어언 6년째. 하지만 들려오는 소문은 해괴하기 짝이 없었다. 정함 무리들은 아예 대놓고 점쟁이들까지 끌어들여 국사를 유린한다는 거였다. 점쟁이는 정월 초부터 삭풍이 불어대자 나라에 근심이 발생할 것이라며 주상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이런 근심을 없애려면 절에서 제사 지내고 궁도 새로 지어야 한다고 호들갑까지 떨어댄 것이다. 그러자 주상은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다섯 개의 절에 제사를 지내는 한편 아우 익양후의 집을 빼앗아 궁궐을 짓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건 약과였다. 영의는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며 그 씨앗을 지금 당장 없애야 한다며 주상을 다그쳤다. 급기야 주상은 그 말을 믿고 행동에 나섰다. 일부러 모친 공예왕후를 절에 다녀오게 한 후 대령후 경을 천안으로 유배시켜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동래에 있던 그마저도 더 먼 거제도로 유배를 명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새로운 유배지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찾아온 유형의 섬 거제도. 섬에서 그는 촌로처럼 농사를 지으며 생을 연명해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함 일당의 횡포는 멈출 줄 몰랐다. 정함은 축적한 재산으로 금빛 찬란한 집까지 새로 지어 경명궁이라는 편액까지 내걸었다. 사람들은 그런 화려한 건물을 보며 개가 머리를 들고 주인한테 짖어대는 형세라고 혀를 찼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서는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절망하고 절망했다. 그렇게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흘러갔다.

그렇게 유배생활을 한 지 19년째 되던 해였다. 머리털이 하얗게 센 늙은이가 된 그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왕이 이곳으로 행차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이 먼 곳까지 폐하께서 직접 오다니. 이것이 그간의 억울함에 대한 주상의 보답이란 말인가. 임금의 배려가 고맙고 고마웠다. 그런데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주상이 이곳을 찾은 연유는 따로 있었다. 문신들의 횡포에 참다 못한 무신들이 들고 일어나 이들을 제거하고 의종까지 거제도로 쫓아버린 것이었다. 혹시 정함은 어찌 되었는가? 개경에서 달려온 사령에게 물었다.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사람들이 목도 없는 시신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도록 길거리에 끌고 다녔습지요. 정함이 목이 날아갔다지만 이상하게 허탈했다. 마치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해배령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렇게 그가 믿고 기다렸던 임금이 자리에서 쫓겨나 그보다 더 비참한 신세가 되다니. 그는 사령이 건넨 해배문서를 쥔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또 통곡했다.

정서는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리운 가족들을 만났고 그렇게 원하던 원상복직도 되었다. 하지만 예전의 젊은 그가 아니었고 그가 머물던 궐내가 아니었다. 무신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고 새로 주상이 된 명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정서는 명종에게 나아가 청했다. 이제 억울함을 풀었으니 원이 없으며 나이도 있으니 물러나게 해달라고. 명종은 기꺼이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한가하게 노후를 보내며 있을 때, 의종의 시해 소식이 들려왔다. 거제도에 있던 의종을 김보당이 복위운동을 위해 동경(경주)으로 모셔갔는데, 이를 안 팔척장신 이의민이 맨손으로 의종의 허리를 꺾어 죽여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의종을 살해한 것도 모자라 시신을 가마솥 안에 넣어 줄로 꽁꽁 묶은 다음 연못에 집어던져 버렸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정서는 쓰러졌고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었다.

이상섭 소설가

※공동기획: 동서대,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