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 열두 지신이 있다면 서양엔 열두 주신이 있다. 그리스신화에 티탄 12주신과 이를 물리친 올림퍼스 12주신이 있다. 이들 중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신은 누구일까? 남동생 제우스가 아버지 크로노스 배 속에서 꺼낸 오남매 중 하나인 데메테르다.

데메테르의 분노.

그녀의 할머니인 가이아가 하늘과 대비되는 대지의 여신이라면, 데메테르는 먹거리를 여물게 하는 대지의 여신이다. 그녀는 온갖 식물성 곡물, 과일, 채소 등의 생육을 관장한다. 농부는 세상에서 가장 큰 뿌리(農者天下之大本)다. 허튼 옛날 말이 아니다. 공업과 상업 등은 근본적 농업이 잘되고난 후의 파생적 영역이다. 데메테르에 해당하는 동양의 신은 사직이다. 땅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 신하들은 종묘사직을 걸고 왕에게 간언을 올렸다. 종묘(宗廟)가 국가안보 문제라면, 사직(社稷)은 근본경제 문제였다. 먹고사는 경제 문제는 그만큼 중요하다. 맹자도 항산항심(恒産恒心)이라 했다. 지속적 생산이 있어야 지속적 마음이 생긴다는 뜻. 당연히 무항산이면 무항심이다. 먹고살 수 없으면 황폐하며 피폐해진다. 먹고사는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이처럼 중요한 먹거리 경제를 관장하는 여신이니 식물을 먹고사는 동물에게 더 중요한 신은 없다. 그런데 데메테르가 물질적으로 너무나 풍요로워진 로마에서 케레스나 세레스(Ceres)가 되며 존재감이 희석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아침밥을 대충 때워 대신하는 시리얼(cereal)로 격하되고 말았다. 데메테르 여신이 노할 일이다. 사직동 제단에라도 가서 용서를 빌어야 하겠다.

박기철 경성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