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솔사~봉명산~서봉암~다솔사
- 독립투사·불교항일단체 은거지
- 보안암엔 석굴암 빼닮은 석굴
- 태극권 전승하는 봉일암도 명소
- 산책길 평탄하고 소나무 울창

당나라의 한 시인이 ‘산이 높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 신선이 살고 있으면 명산이고,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신령스러운 물’이라고 했다. 비록 금강산의 아름다움이나 지리산의 웅장함을 찾아볼 수 없더라도, 찾는 사람이 많고, 큰 뜻을 품은 인물이 신선처럼 은거하고 있다면 명산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경남 사천시 곤명면 봉명산은 높이가 해발 408ｍ에 불과하고 기묘하게 생기지도 않았다. 신비로운 기암괴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확 트인 전망이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산세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고 밋밋하게 생겨 고만고만한 산이다. 그러나 봉명산이 품고 있는 천년고찰 다솔사는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의 은거지였다. 불교계의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만당(卍黨)의 근거지 다솔사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을 비롯하여 최범술, 김법린, 김범부, 김동리 등이 기거했다. 한학자 이갑규 선생은 ‘이분들이 봉명산의 신선’이라고 말한다. 다솔사가 대단해서도 아니고, 봉명산이 높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이분들이 바로 신선이었고, 또 그 신선이 살았기에 봉명산과 다솔사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은거하며 걷던 길

	한 등산객이 산 등성이에 있는 제1 쉼터에서 봉일암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있다.

남해고속도로 곤양IC에서 곤양면 소재지를 지나 5분가량 달리다가 왼쪽으로 꺾어 2, 3분을 더 가면 봉명산 다솔사가 나온다.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적멸보궁을 바라보면 오른쪽으로 ‘죽로지실’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건물 끝에 안심료(安心寮)가 있다. 한용운 선생 등이 머물렀던 객실이다. 안심료 벽에는 한용운과 김동리가 묵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걸려 있고 앞뜰에는 회갑을 맞은 만해 선생이 심은 황금편백이 우람한 모습으로 서 있다.

봉명산을 오르는 ‘다솔사 명상의 숲길’은 곤양면 무고리 만점마을이나 곤명면 초량마을에서 시작하는 코스도 있지만 대부분 다솔사 앞마당에서 시작한다.

다솔사에서 왼쪽으로 몇 걸음만 가면 산불감시 초소가, 그 앞에 군립공원임을 알리는 목재로 만든 구조물이 있다. 또 갈림길에서 좌우 어느 쪽으로 올라도 500여ｍ를 오르면 산등성이의 제1쉼터에서 만난다. 왼쪽 길은 바닥에 작은 돌을 깔아 쉽게 오를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이용한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난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아 울퉁불퉁 하지만 아름드리 참나무 사이로 ‘사그락사그락’ 낙엽을 밟으면서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태극권 전승에 공을 들이는 봉일암을 볼 수 있다. 봉일암을 나와 가파른 목재 계단을 300여 ｍ 올라야 산 중턱의 제1 쉼터에 닿는다.

여기서 다시 오른쪽 길은 봉명산 정상과 전망대를 거쳐 약수터 입구의 제2 쉼터에 이르고, 왼쪽은 소나무 숲 사이의 평평한 길이 제2 쉼터까지 이어진다. 정상으로 가는 오른쪽 길은 제법 가파르다. 정상길은 나무뿌리가 드러나 있고 바위가 계단처럼 이어지기도 해 찾는 사람이 많음을 짐작게 한다.

정상에는 표지석과 함께 높이 5, 6ｍ의 정자가 있다. 봉명정이다. 서쪽으로 지리산 천왕봉이 훤히 보이고 반대쪽으로는 남해 바다가 아련히 조망된다. 맑은 날이면 인근 진주시와 하동의 금오산, 옥산 등도 볼 수 있다.

정상에서 왔던 길과 반대쪽으로 600여 ｍ 내려가면 운동기구와 평상이 있는 널찍한 약수터의 입구인 제2 쉼터가 나온다. 누군가가 소나무 사이에 끈을 묶어두고 그 끈에 산악회나 동우회 등의 기념 리본을 매달아 눈길을 끈다. 여기서 산등성이 길로 300여 ｍ를 가다가 왼쪽으로 500여 ｍ를 더 가면 보안암이 있다. 성곽처럼 높이 쌓은 석축 위에 제비집 같은 암자가 있고 그 곁에는 경주 석굴암을 축소해 놓은 듯한 석굴(경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도 있다.

왔던 길을 돌아 나와 오솔길을 걷다 보면 울창한 숲과 소망돌탑이 있는 너들 지대를 만난다. 여기서 철탑을 돌아 봉암산 정상~서봉암 1.5㎞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너비에다 바닥도 평평해 말 그대로 산책길이다. 커다란 바위가 널린 봉암산 정상을 둘러보고 서봉암으로 내려와 숨을 돌린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암자에 스님은 보이지 않고 담장 너머에 핀 매화가 사람을 반긴다.

■머릿속까지 시원한 명품 산책길

	만해 한용운 선생과 소설가 김동리 선생이 기거했던 다솔사 안심료.

서봉암이 반환점이다. 여기서 돌아가는 길을 잘못 찾으면 헤매게 된다. 암자 앞 주차장에서 왼쪽의 콘크리트 포장길은 용산마을로 내려가는 찻길이다. 길이 좋다고 무작정 따라갔다가는 낭패를 본다. 출발지점으로 돌아가려면 서봉암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난 숲길을 50여 ｍ가량 걸어가다가 계곡 쪽으로 내려가는 이정표를 보고 따라가야 한다. 조금만 내려가면 차밭이 있고, 차밭 둑을 가다 보면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작은 계곡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약간 오르막이다. 산죽밭을 지나고 개울을 따라 오르면 오른쪽으로 작은 습지가 보이고 층층 다락밭 흔적도 보인다.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약수터를 만난다. 햇볕을 차단하고 떨어지는 낙엽도 막는 차양 시설이 돼 있고 그 아래 돌무더기 사이에서 물이 솟는다. 아무리 심한 가뭄이나 폭우가 내려도 솟는 물의 양이 일정하단다.

약수터 입구의 제2 쉼터에서 다솔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평탄하다. 여기서 처음 만난 제1 쉼터까지 900여 ｍ는 울창한 소나무가 하늘을 덮을 정도다. ‘명상의 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길이다. 몇몇 나무에는 명언과 함께 ‘다솔사 명상의 숲’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숲 이름이자 길 이름이다. 길을 걸으면 가슴이 시원하고 머릿속이 청량해지는 기분이다. 걷기만 해도 명상이 되고, 여러 사람이 함께 걸어도 혼자인 듯한 길이다. 그래서인지 인근 진주는 물론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찾는 ‘명품 산책길’이 되고 있다. 총 3시간이 소요된다.

이완용 기자 wyle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