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프랑스 노철학자의 '사부곡(思婦曲)'이 유럽인들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셨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좌파 지식인인 앙드레 고르가 간행한 '아내에게 쓰는 사랑의 편지' 얘기다. 83세 남편이 쓴 이 책에는 30년 넘게 암과 싸워온 한 살 연하 아내 도린을 사랑하는 절절한 감정이 넘쳐 흘렀다. 그런 그가 지난달 25일 아내와 동반자살했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이란 거작을 남긴 이 실존주의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 세상에 정말 안녕을 고했다. 생태주의 철학자이자 '일자리 나누기' 개념을 주창한 노동 사회학자로 타인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아온 고르였지만 정작 자신에겐 무관심했던 것일까. 그가 이 세상을 떠난 이상 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란 프로이트 같은 몇몇 철학자들의 얘기를 떠올려 보면서 이 난제 속으로 가만히 발을 내디뎌 볼 수밖에.
프로이트는 1920년 인간의 자살을 '타나토스(Thanatos, 죽음의 본능)'라고 해석했다. 인간은 삶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반대로 죽고 싶은 본능도 갖는데 이 양자는 인간생활에서 적절히 혼합돼 나타난다는 주장이다. 에로스와 함께 자살을 인간 본능 중 하나로 본 프로이트의 견해에 따라 죽음에 대한 한 특성이 도출됐다. 사람들은 외부 요인보다는 본능에 따라 죽음을 좇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프로이트의 학설과 관련해 후대 학자들은 전쟁 때보다 평화로운 시기에 자살률이 더 높고, 복지국가의 자살률이 저개발국의 그것을 훨씬 상회한다는 사실 등 여러 증명자료들을 제시하면서 힘을 보탰다. 에리히 프롬은 생존 경쟁이 갈수록 심해지고 고독·소외감이 만연하는 사회일수록 '타나토스'가 강하게 발현하며, 마침내 집단자살 같은 극단 상황까지 생길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반면에 에밀 뒤르켐은 자살을 사회적 현상으로 보면서 이타적·이기적·아노미적 자살로 세분했다. 그는 여기에서 한 개인이 소속 사회에 대해 가진 융합 정도와 정신적으로 적응하려는 행동이 결정타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인간 자살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지금까지 철학적 고찰 대상으로 숱한 주장과 학설을 남겼다. 일찌기 아리스토텔레스와 소크라테스는 자살을 잘못된 행동으로 규정했다. 스토아학파의 세네카는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방법이 죽음 말고는 다른 것이 없을 때 이 세계를 떠날 시간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오직 철학자에게만 속하는 지고의 존엄이다"라며 지지했다. 자살은 예부터 인간이 범접해서는 안되는 금단·죄악의 영역에서부터 평생 오직 한 번의 선택권을 행사하는 자유권리지대에 이르기까지 다리를 넓게 걸치고 숱한 사상가와 철학자들의 입을 열게 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의 자살자 비율은 사망자 100명당 4명 꼴로 사인(死因) 8위라고 한다. 이은주 김광석 서지원 같은 연예인이 스스로 생명을 버렸을 때 모방 현상이 사회적으로 우려될 만큼 우리 역시 자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무섭고 끔찍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면으로 응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죽음의 한 방법인 자살은 삶의 가치를 깨우쳐 준다는 역설에 대한 신뢰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는 것 처럼.
가을의 문턱에 아내와 함께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프랑스 노철학자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