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 전남 화순을 여행할 때였다. 쌍봉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김제 금산사와 함께, 쌍봉사는 영남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가람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여행을 안내한 지인은 또 한 가지 솔깃한 소식을 들려줬다. "이 절 근처에 소설가 정찬주 씨가 내려와 살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가 사는 집의 이름은 '이불재'란다. 그때 그는 '하늘의 도'라는 작품을 인터넷신문 프레시안과 화순군청 홈페이지에 연재하고 있었다.

뒤에 알고 보니 '하늘의 도'는 조선 시대 조광조를 중심으로 사림의 이야기를 쓴 유교 소설이었다. 뜻밖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정찬주는 '불교의 정찬주'가 아닌가. '암자 가는 길' '선방 가는 길' 등 그가 써낸 불교에 관한 산문은 깊은 내공과 함께 맑은 기운으로 독자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작가 정찬주가 정신과 영혼의 목마름을 호소하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준 선물 가운데 우뚝한 것을 꼽자면 1998년 나온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가 낳은 가장 위대한 부처"(소설가 최인호) 성철 스님(1911~1993)의 삶과 정신을 그려낸 소설이다.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든 날은 1993년 11월 4일 아침. 스님의 14주기에 맞춰 열림원출판사는 잠시 독자들에게서 잊힌 듯했던 '산은 산 물은 물'을 새롭게 꾸며 재출간했다. 초판이 나온 지 9년만이다.

초등학교 때 읽은 '어린 왕자'와 어른이 된 뒤 읽은 '어린 왕자'가 같을 수는 없다. '나'도 변했고 세상도 변했기 때문이다. 이때 '어린 왕자'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된다. 그래서 "감명 깊게 읽은 책을 세월을 두고 다시 읽으면 내가 보인다"고까지 하지 않던가.

그런 이유에서인지 9년만에 돌아온 '산은 산 물은 물'에는 놀라운 흡인력이 있다. 성철 스님의 삶과 그가 살았던 시대가 탄탄하게 복원돼 있고, 수많은 일화는 생생하다. 성철 스님과 함께 시대를 살았거나 그를 회고하는 사람들은 모두 실명으로 기록했다. 소설의 옷을 입었지만 서정적인 다큐멘터리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전체적으로 맑은 느낌의 소설이지만, 여기에다 세상의 시시비비에 가장 민감한 직업인 검사를 화자로 택해 문학적 긴장감도 유지하고 있다.

기사를 쓰기 위해 책에 수없이 밑줄을 치고 책 모퉁이를 접어가며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선명해지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이 꼭 하나 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두 권을 합해 700쪽에 이르는 소설 '산은 산 물은 물'은 이 두 마디에 광선처럼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