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2, 3년 사이 일반고에 '특강'이란 걸 하러 간 적이 몇 번 있다. 강연 요청이 올 때마다, 될 수 있으면 정중하게 거절하려고 애썼다. 청소년에게 뭔가 근사한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줄 만큼 열심히 공부하거나 깨우친 게 없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청소년을 만나 숨결과 목소리를 직접 접하고, 사회인으로서 우리 사회 미래세대를 위해 뭐라도 도움을 주는 게 마땅하다는 의무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연 요청은 주로 진로체험 쪽있었는데, 이야기하다 보면 꼭 창의성을 강조하게 됐다. 그럴 때마다 임진왜란 때 한산도해전을 중요 사례로 들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작정했다기보다, 그렇게 됐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한산도해전의 창의성 지수는 100점 만점에 100점이다.

첨단 통신장비가 없던 그 시대에 육중한 판옥선 70여 척이 깃발 들고 북 울리는 신호만으로 전후좌우 기동, 급선회, 함포사격, 추격전, 섬멸로 이어가는 고난도 작전을 일사불란하게 수행한 것은 경이롭다. 적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전개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창의적이다. 그 결정체가 학익진이다. 적으로 하여금 "조선 수군과 아예 싸우지 마라"는 방침을 세우게 했을 만큼 전략상 성과도 컸다.

강연이 이쯤 오면 다행히 학생 몇몇은 눈을 반짝인다. 그런데 정작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그 뒤에 나온다. 기록과 연구를 검토하면, 전투와 전쟁에 관한 한 이순신 장군의 철학과 방식은 고대 중국 고전 '손자병법' 안에 다 들어있다. 거의 벗어나는 게 없다.

창의성이란 우연히 평지돌출로 솟아오르기보다는 역사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과정에서 내면에 쌓는 자질이다. 이순신 장군도 '손자병법'의 세계를 창의적으로 해석해 숱한 승리를 거뒀다. 인류사에서 창의성이 극도로 융성한 14~16세기 유럽 르네상스 시대 구호도 (고대 로마 그리스의)'고전 정신 재발견' 아니었나. 인문학을 요약하면 문(학)·(역)사·철(학)인데 역사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입이 잘 안 떨어진다. 인문학에서 배울 바를 동아시아식으로 표현하면 '천하는 어떠하며, 나는 어떠한가. 천하에 나가 나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고 공부하는 것일 텐데, 이런 이야기는 고교생에게 더 하기 힘들다. 마음으로는 청소년 시절에 이런 걸 배우면 참 좋을 텐데 싶지만, 현실에서는 권하기도 쉽지 않았다.

청소년이 입시로 너무 바쁘거나 공부에 치여 살기 때문이지 싶다. 수능 걱정뿐인 그들에게서 틈이 잘 안 보인다. 어른이 만든 인문학 열풍에서 청소년이 배울 게 얼마나 있을지도 묻게 된다.

인문학 바람이 몇 년 불었지만, 어른들 세계에서 인문학 수강은 '열심히 공부해 나를 변화시키는 실천'에 닿지 못하고, 액세서리처럼 나를 장식할 지식을 공짜 강의로 듣는 데 머문 경우가 여전히 꽤 있는 듯하다. 청소년이 보고 배울 게 적다.

이런 형편에도 굴하지 않고 청소년에게 인문학의 유용함과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전하려 애쓰는 일선 학교 담당 교사들께 감사드린다. 청소년이 인문을 접할 기회가 늘어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