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유수의 영화제 위원장들
- 수십년째 자리 지키며 축제 지휘
- BIFF 새 비전 찾겠다는 부산시
- 옹색한 구실로 민주주의 역행
누구나 "나는 네가 싫다"고 말할 수 있다. "네가 틀렸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나는 네가 싫다. 그러므로 너는 틀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산시가 지금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하고 있는 일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네가 싫다. 그러므로 너는 틀렸다'.
좋고 싫음을 옳고 그름과 구분 못하면, 너무 큰 혼란이 온다. 권력이 있다고, 정권을 잡았다고 모든 걸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싫다'는 이유로 '틀렸다'는 딱지를 붙여 다 쫓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부산시는 최근 BIFF 이용관 집행위원장에게 사퇴하라고 압박했다. 'BIFF 20년을 맞아 새로운 비전을 갖기 위해 새로운 사람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지난 연말 지도점검에서 지적된 사항이 많다'는 이유를 표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그 이유는 빈약하다.
시가 내세운 이유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민간 예술축제에 대해 행정기관인 시가 "당신들에게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니 당신들의 수장을 우리가 바꿔야겠소"라고 한 것이다. 예산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세계적 권위를 쌓은 민간 예술축제를 시의 산하 기관으로 여긴 셈이다. 이렇게 되면 축제의 생명력은 끝이다.
말이 난 김에 새로운 비전에 대해서도 짚어 보자. 비전은 경험과 통찰이 쌓이고 서로 스며들면서 형성된다. 행정기관이 예산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간섭하고 압력을 행사해 갈등을 일으킬 때마다 축제는 비전을 잃은 채 위기에 빠졌고, 에너지를 낭비한 끝에 퇴행의 덫에 걸렸다.
2004년 부천국제판타스틱, 2005년 광주국제, 2012년 전주국제, 2013년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이런 갈등과 후퇴를 겪을 때마다 한국 영화인들은 "그래도 믿을 건 BIFF" "BIFF가 있어 든든해"라고 했는데 이번엔 기어코 BIFF가 마수에 걸려들었다.
정치가 행정가들은 자주 BIFF를 놓고 '세계 3대 영화제에 버금가는 비전'을 주문했다. 그렇다면 이들 영화제의 상황은 어떨까.
질 자코브, 23년간 칸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지냈고 지금은 회장. 후임인 1960년 생 티에리 프레모는 2000년부터 16년째 칸 집행위원장. 모리츠 데 하델른, 베를린영화제 집행위원장 22년 역임. 후임 디이터 코슬릭은 15년째. 제프리 길모어는 선댄스 집행위원장을 19년 한 뒤 트라이베카영화제로 옮겼다.
처한 상황이 다른 해외 영화제를 따라 하자는 게 아니다. 세계 주요 영화제에서 새로운 비전이 생성되는 방식은 행정기관과 같지 않을 수 있음을 행정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시의 지도점검에서 나온 지적사항도 그렇게 심각한 수준이 아님을 보면, 결국 이번 사태는 지난해 BIFF가 '다이빙벨'을 상영한 데 따른 보복성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다시 문제는 돌아간다. 시는 '다이빙벨'을 상영한 BIFF가 싫다는 이유로 'BIFF는 틀렸다'고 낙인찍은 뒤 나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가 희생된다. 민주주의는 권력이 있어도 사리에 맞아야 행할 수 있음을 뜻한다. 뭔가 큰 위기가 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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