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슈이치의 장편소설 '악인'. 살인과 서스펜스, 미스터리 등 책날개에 적힌 소설의 대략적인 정보가 더해지면 '악인'은 살인사건의 주범인 살해 용의자를 지칭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하고 명징한 단어의 제목보다도 마음에 더 끌리는 것은 소설의 목차다. 이야기 속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키워드가 제공되기 때문인데, 그 키워드는 '만남'이다. 이를 통해 사건의 주요 인물인 '그'와 '그녀'가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얽히고설키는 그 복잡한 인과관계의 과정과 살인이라는 파탄에 이르게 되는 잘못되고 어긋난 만남에 대한 의미 역시 유추할 수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작가의 시선은 263번 국도의 미쓰세 고개에서 살해당한 요시노와 그녀를 살해한 유이치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인물들에 대한 형상화도 예리하다. 눈여겨볼 것은 그들의 관계다. 사리와 마코는 요시노의 유일한 친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속마음을 나누지 않는다. 히후미 역시 유이치를 두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녀석이라고 말한다. 애면글면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부모의 성화에 요시노는 진저리를 치고, 친모에게 버림받고 조모의 손에 키워진 유이치에게 조모는 유이치의 자동차보다 못한 존재다. 요시노가 관계를 맺는 이성은 주로 인터넷 만남 사이트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욕망하는 대상은 누구나 선망하는 마스오다. 물론 마스오는 요시노를 그의 부모가 운영하는 온천여관 종업원쯤으로 여길 뿐이다. 유이치 역시 만남 사이트를 통해 이성을 만나게 되는데, 상대 여성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일방적 관계 맺기를 거듭할 뿐이다.

옮긴 이의 말에서 '악인'은 인간의 부조리와 선악의 문제를 다룬다고 한다. 그래서 요시노를 죽인 범인이 누구냐는 의문은 유이치는 왜, 어떻게 살인자가 됐느냐는 질문으로 전환된다. 과연 요시노를 죽인 악인이 유이치인가, 혹은 살해당한 요시노는 선인이냐는 새로운 질문도 하게 만든다. 누가 진정한 악인인가라는 질문이 시대와 역사를 초월한 인간 본연의 문제를 함의한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소설의 귀결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복잡한 현실세계와 인간관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유이치의 조모인 후사에와 살해당한 요시노의 부친인 요시오가 지금,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가해자의 부모이든 피해자의 부모이든 사건 당사자의 가족으로서 그들의 삶은 똑같이 참담하다. 언론과 이웃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딸을 죽음으로 이끈 미쓰오에게 비웃음을 산다. 그러나 절망의 나락에서 이들을 일으켜 세운 건 다름 아닌 '만남'이다. 평소에 마주치길 꺼렸던 버스 기사에게 후사에는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한다는 충고를 듣고, 요시오는 마스오의 친구인 쓰루다의 도움을 받는다.

이후 요시오는 한동안 열지 못했던 이발소 이시바시를 다시 열게 되고, 후사에는 더 이상 도망치며 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우연에 불과했던 만남이 그들에게 다시 생을 살게 한 것이다.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만남, 삶을 살게 하는 만남에 대해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