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학자 정천구 박사가 쓴 논어 해설서 '논어, 그 일상의 정치'(산지니)를 읽다가 이 대목을 만났을 때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예법은 윗사람이 먼저 갖추는 것이어야 한다."(338쪽 '향당' 편 해설 중) "예의가 윗사람이 먼저 갖추는 것이라면, 정치 또한 윗사람이 자신을 먼저 바르게 하는 데서 시작된다."(403쪽 '안연' 편 해설 중)

예의, 예절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갖추고 지켜야 할 규범과 형식'으로 완고하고 좁게 해석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큰 약점이자 고질병이라고 생각해오던 터였다. 다툼만 벌어졌다 하면 불문곡직하고 멱살을 잡으며 "너, 몇 살이냐?"하고 나이와 지위부터 따지는 행태를 볼 때마다 '대체 진실이 나이와 무슨 상관인가'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지난 3일 타계한 동보서적·동보극장 창업주 김태환 동보프라자 회장의 빈소에 갔다. 거기서 동보서적(2010년 문을 닫음) 옛 직원 그리고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예의를 윗사람이 먼저 갖출 때' 어떤 문화, 어떤 추억이 생기는지 체험한 기분이다.

빈소에 앉자 "동보서적 곁에서 노점상을 하며 노래테이프를 팔던 할머니가 다녀가면서 고인의 손주들 손을 잡아주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 동보서적이 문 닫은 지 5년이 지났는데도 빈소 앞에는 '동보서적 직원 일동'이라는 화환이 단정하게 서 있었다. 상주 측은 조의금은 사양했고, 조문을 마치고 가는 손님들에게 주차권을 챙겨주느라 바빴다.

1975년 개장해 1993년 폐장한 동보극장과 1980년 생긴 동보서적은 부산 최대 번화가 서면 한복판에 있었다. 대형 서점 사업이란 파는 상품(책)의 단가는 낮고, 직원은 많이 써야 하는 업종이다. 옛 직원들의 추억담은 다양했다.

"점심시간에 서면 일대 음식점에 이틀 연속 가시는 법이 별로 없었어요. 골고루 팔아줘야 한다면서 날마다 식당을 바꾸시곤 했죠." "동보서적 주위에 노점상이 꽤 많았습니다. 그분들한테 '갑질' 같은 건 하신 적이 없죠. 노점상인분들이 화장실 이용하고, 찬물 더운물 마신 곳이 동보서적 매장이었어요." "무척 엄하고 검소하셨지만, 돈을 써야 할 곳에는 흔쾌히 결정하셨습니다."

그렇게 흔쾌한 결정은 문화 후원으로 이어졌다. 20년 이상 이어간 부산청소년연극제를 비롯해 어린이글쓰기공모, 무료 독서정보 매체 '책소식' 발간, 요산문학제 독후감 현상 공모 등의 활동은 지역 문화계가 잘 아는 역사다. 이 밖에도 예술문화계에 후원과 협찬을 지속했는데, 이 또한 김 회장의 마음이 뒷받침됐기에 이어질 수 있었다.

부산청소년연극제에 참가한 실업계고 여학생이 이 경험을 발판 삼아 뒷날 교수가 되기도 했으니 이 서점의 문화 후원이 얼마나 많은 미래세대에게 좋은 문화 체험 기회를 선사했을까. 고인이 실천한 '예의'에 관해 들으니 문화기업의 조건과 추억이 새삼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