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즈음으로 기억한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친구들과 6월 항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이곳저곳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그때 박정기 씨를 만나 인터뷰하게 됐다. 그는 1987년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다. 인터뷰는 경남 양산의 작은 암자에서 진행했고, 담담한 어투에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졌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그와의 첫 만남이다.
2015년 여름, 유월의 아버지가 출간되었다. 이 책은 박정기의 구술과 직접 쓴 일기를 바탕으로 그의 회고를 담고 있다. '1986년, 정년퇴임을 한 해 남겨둔 박정기의 꿈은 목욕탕 집 주인이었다'(36쪽).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박정기 씨의 삶은 소박한 꿈과 달리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1987년 1월 14일(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발생일) 저녁 무렵,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사람들이 함께 서울로 갈 것을 요구했고, 마음을 크게 먹으라는 말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렇게 오른 서울행 새마을호는 자정을 넘어 암흑 속을 달렸다. 서울에 도착해 몇 번이나 아들에 관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려달라는 말뿐이었다. 그는 기다림이 지루하기보다 두려운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기다림의 결과는 아들의 죽음이었다. '박정기는 한줌 한줌 아들을 임진강에 뿌렸다. 겨울비가 흩뿌렸다. 손을 펴자마자 바람이 아들을 낚아챘다'(60쪽).
박정기 씨는 아들의 죽음을 고통과 슬픔으로 끌어안으며 1987년 6월 항쟁과 함께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한가운데 서게 된다. 그는 아들의 1주기를 앞두고 다시 임진강을 찾는다. 그리고 지난 1년의 변화를 그의 육십 평생의 변화보다 큰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변화의 시간 동안 알 수 없는 삶의 물결에 실려 걸어왔다고 회상한다. 그것은 아들이 걸었던 길을 헤아리는 시간이었다. 이 시간은 그의 삶에 하나의 선택과 결단이 되었다. '4월에는 고려피혁의 최윤범 노조위원장이 분신했다. 5월에는 연세대 학생 고정희가 강남성모병원에서 의문사했다. 그리고 고정희가 운명한 지 이틀 만에 또 한 명의 대학생 조성만이 생명을 잃은 것이다'(161쪽).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활동을 이어가던 박정기 씨가 기억하는 1988년의 대한민국은 누군가 죽지 않는 달이 거의 없었다. 많은 학생과 노동자가 아들 박종철처럼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 죽음들 앞에 언론은 침묵했고 TV는 온통 올림픽 열기로 물들었다. 세상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 현재에 도착한다.
지난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담당 검사였던 박상옥이 대법관으로 취임했다. 그의 취임사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할까 한다. "지난 1월 21일 제가 대법관 후보자로 임명 제청된 후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의 과정에서 법원 가족 여러분께 적지 않은 심려를 끼쳐 드린 데 대해 송구한 마음도 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 박정기 씨의 일기. '1965년 4월 1일생. 2000년이 36세라고 한다. 깜짝 생각만 하면 정말 자지러진다. 마음이 매우 아프다. 나이 36세이면 과연 무엇을 하고 어떤 생각으로 살 것이며 사회에 어떤 봉사자로 임하고 있을지. 철아, 그래도 아버지는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그립구나. 한참 더 생각해도'(315쪽).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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