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마무리되었다. 몇 편 안 되지만 보았던 영화들 틈에서 떠올린 무겁지 않은 단편의 생각이 있다.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자개단추', 세자르 아세베도의 '대지와 그늘' 두 편의 영화의 뒤편에서 그 생각은 조금 더 오래 머물렀다. 이 작품들은 남미 출신 감독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칠레의 대자연과 역사, 그리고 콜롬비아의 민중을 영화에 담아내고 있다.

특히 유려한 촬영으로 프레임에 담아낸 인상적인 이미지들은 한 편의 시와 같았다. 이같은 시적 이미지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문득 생겨나는 궁금증이 있었다.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시는 없을까?

손택수의 시집 '목련전차'는 내가 품었던 그 의문과 닿아 있었다. 시인의 서정적인 시구를 차분히 따라가다 보면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이미지 어디쯤 도착한다. 흰 종이 위에 적힌 활자들을 읽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활자들이 운동하는 이미지로 전환되어 한 편의 영화로 완성된다.

"지난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 사이는 고작 몇 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소리가 부풀어 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장생포 우체국' 100쪽)

그의 '장생포 우체국'이라는 시를 들여다보면 롱 쇼트의 사이즈로 찍혀진 강한 색감의 단일한 사진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사진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나운 바다를 뒤로하고 우체국에 지난밤 적은 한 통의 편지를 부치러 들어온 사내의 모습이 잔잔한 침묵 속에서 영화 속 장면으로 등장한다. 얼핏 스치며 보았던 공간을 이 시구와 결합하고 배우의 얼굴을 수차례 바꿔 대입하다 보면 시구는 끝을 보이고 상상의 공간에서 연출한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된다. 더는 이 한 편의 시는 책장에 머물지 않는다. 이 시구는 궂은 날씨의 배경, 바다와 인접한 어느 공간, 다양한 형태의 우체국, 그리고 바다를 품은 사람의 얼굴에서 매 순간 다른 테이크로 연출될 것이다.

"그가 처음 집에 인사 왔던 날을 기억합니다. 그때 그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구두였습니다. (…) 몇 년 만에 만난 그는 상할 대로 상해 알아 볼 수조차 없었습니다. 뒷 굽은 닳을 대로 닳았고 반짝이던 코 무참히 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날 식장을 나선 한 켤레의 구두가 걸어왔을 길을 아득히 헤아리면서 상처투성이 깨어진 코에 약을 발랐습니다." ('매제의 구두' 54쪽)

'매제의 구두'가 영화로 촬영된다고 가정해보자. 집으로 인사 오는 매제의 모습이 보이고 난 뒤에도 한동안 카메라는 매제의 새 구두 주변을 서성거릴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난 매제의 모습에서도 카메라는 한참이나 매제의 상처투성이 구두에 머무를 것이다. 이 가상의 영화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에 불과하다.

영화에는 시나리오라는 활자 형태의 과정이 존재한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다시 가상의 이미지인 콘티 형태로 발전시켜 실제 이미지를 카메라에 담아낸다. 하지만 '이미지가 될 수 있는 활자'와 '활자가 될 수 있는 이미지'는 분명 다른 지점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다음의 의문으로 넘어갔다. 이미지가 될 수 없는 활자? 활자가 될 수 없는 이미지? 시에서 생겨난 의문은 결국, 영화로 회귀했다.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