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날이면 청춘의 덧니 같은 옥상에 올랐다. 옥상의 가슴에 보름달 구멍을 내고 세고비아 바람의 현을 켰다. - 본문 중에서

적도 위에서 한 사내가 배를 젓고 있다. 흰 배는 고요하다. 파도소리가 들리고 그의 배는 조금씩 물결을 헤쳐가고 있다. 배가 닿는 곳은 어디일까? '마리아나해구'이거나 '명왕성'이거나 어쩌면 '소라여인숙'이거나 사슴 한 마리 같은 '영원'인지도. 푸른 지구는 출렁이는 바다 위에 하나의 질문처럼 떠 있다.

저자는 바다를 노래하는 시인이며 수필가이다. 청춘을 바다에서 보냈고 지금도 바다를 벗하며 살고 있다. 시집 '숟가락 사원'에 이어 4년 만에 나온 산문집은 50편의 다양한 이야기를 3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각종 신문에 발표한 칼럼을 모은 산문들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준다. 단순한 서사 위주의 신변잡기를 배제하고 사물의 깊은 곳을 천착하여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읽으면서 어떤 문장들은 불편하고 거칠고 그래서 한편으론 새롭다. 편안함에 안주하는 걸 허락하지 않는 그의 글들은 한 편을 읽고 책을 덮고 또 한 편을 읽고 책을 덮게 만든다. 어릴 적 이불 속에 숨어서 아껴먹던 과자처럼.

'봄날, 그리운 것들은 모두 편지다. 꽃은 나무에게 파도는 해안에게 새는 또 허공에게 저마다 간절한 편지다. 꽃잎과 파도와 새들이 쓴 글들은 고요하고 푸르고 한쪽 귀퉁이가 조금 젖어있다. 봄엔 보고 싶어 사무치는 것들이 편지를 쓰느라 바쁘고 소란스럽다. 저 시끄러운 편지를 다 읽다 보면 봄날은 갈 것이다.' - 본문 중에서

그리움이란 낡은 옷자락에 배여 있어서 아무리 빨고 헹구어도 말끔히 지워지지 않는 자국 같은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것들은 가슴 저 밑바닥에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시간의 사진첩에 저장되어 있다가 아련히 피어나는 것들. 첫사랑, 할머니, 만기 형, 기차 …….

삶은 날마다 팍팍하고 우리의 영혼은 물질문명에 지쳐 있다. 그럴 때 가끔씩 올려다보는 하늘처럼 저자는 1960~1970년대의 흑백필름을 꺼내 우리를 위로해준다. 촤르르, 촤르르 낡은 영사기가 돌리는 풍경들의 파노라마. 누구든 그리움 하나 가슴에 품지 않고 사는 이가 있을까. 거칠면서 부드럽고 차가우면서 따뜻하고 예리하면서 둥근 그의 문장들은 한 줄 한 줄이 잠언이다.

'뙤창은 자연을 소유하지 않는다. 인간의 욕심에 따라 왜곡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의 상태를 전달한다. 획일적으로 정의하지 않으며 원래의 자리에 두고 그윽하게 바라보기만 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 사물은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 아침이면 뙤창에 성에꽃 가득 피어났다. 그건 겨울이 보낸 그림엽서였다. 눈의 왕국에서 보낸 순백의 상형문자들은 내가 미처 해독하기도 전에 암호처럼 사라져버렸다. - 본문 중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했다. '마루', '샛문', '뙤창', '등멱', '까디' ……. 그것들은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져갔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찰나 같은 별똥별의 궤적이 오래 가슴에 남아있는 것처럼.

그리운 것들의 손을 잡고 나도 여행을 떠나본다. 미안했던 것들, 안타까웠던 것들, 눈물 흘리던 것들, 그러면서 어느 순간 행복했던 것들의 이름을 부르며. '내 안의 오지(奧地)로 떠나는 나의 가난한 여행자(旅行者)에게 바치는 쉰 편의 노래' 속으로.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