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젊은 예술가 부부가 있다. 남편은 무명 록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친다. 아내는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고 싶어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20대에는 그림과는 거리가 먼 대형미술 제작소에서 밥벌이를 하며 지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의 삶은 힘든 법. 어떤 음악을 연주하고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조차 막막하다. 그렇게 예술가 부부의 삶은 닳아가고 있었다.
부부는 어느 날 런던으로 훌쩍 떠난다. 이대로 삶이 희미해질 것이라는 절박감이 그들의 발길을 재촉한다. 런던의 물가와 방 값은 비싸다. 부부는 집 전체를 빌린 사람에게 달세로 방 하나를 얻어 낯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며 점점 더 예술과 멀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는 길을 걷다 리젠트 공원 근처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블루 플라크를 발견한다. 블루 플라크-푸른색 명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버지니아 울프, 이 집에 살다.' 세상에. 버지니아 울프가 저 집에 살았다. 이 거리와 골목과 공원을 버지니아 울프도 걸었으리라. 전율이 일며 거리가 새롭게 보였다. 자살로 생을 끝낸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고민이 새롭게 다가왔다. 방황하던 예술가 부부는 런던의 블루 플라크를 찾아다닌다. 그리고 예술가로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길을 다시 발견한다. 스스로를 '싸구려 압정'으로 생각했던 부부는 붙어 있으니 '최고의 압정'이라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영국 런던은 그 도시에 살았던 유명한 예술가와 사상가의 집에 블루 플라크를 붙여 기린다. 블루 플라크는 직경 50㎝의 원형이다. 반드시 그 사람이 살았거나 일했던 건물에 붙여진다. 그 명판은 현재의 건물과 과거의 사람을 연결해서 공감대를 확장한다. 벽돌로 쌓은 단순한 건축물이 명판을 달면서 한 사람의 삶과 성취를 안은 색깔로 다가온다.
부부는 자신들이 다녔던 블루 플라크 23곳을 책에 올렸다. 찰스 디킨스, 존 레넌, 랭보, 아서 코난 도일, 반 고흐. 아니 반 고흐가 런던에 살았다고? 물론이다. 1873년에서 1874년의 짧은 기간이지만 말이다.
화가 송정임은 런던에서 그림을 다시 시작하고 권위 있는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한다. 책에 도 블루 플라크의 감흥을 살리는 그녀의 정감 넘치는 수채화가 실려 있다. 음악가 김종관은 런던 칼리지 오브 뮤직에서 기타 퍼포먼스과를 졸업하고 덴마크에서 공연을 했다. 그 후 부부는 한국으로 귀국해 예술 활동에 심취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런던의 블루 플라크에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 만약 부산에 가난한 외국인 예술가들이 온다고 하자. 그들 외국인이 부산의 거리를 걸으면서 용기와 힘을 얻을 곳이 있을까? 부산에서 살아간 예술가와 사상가의 흔적은 남아 있는가? 그들이 살았던 건물과 집은 개발의 광풍에 휘말려 사라진 것은 아닐까?
인류학자 김현경은 근대는 공간을 압축하고, 거리를 말소하며, 장소를 파괴한다고 말했다. 오늘의 한국인은 끝없이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무한궤도에 갇힌 것은 아닐까? 런던에는 900개의 블루 플라크가 있다.
소설가·작가의 드론독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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