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벌레 소리가 창을 넘어온다. 새벽엔 이불깃이 당겨지는 요즘이다. 지난여름은 무더웠다. 연일 폭염경보가 내려지고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혔다. '이 모든 것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견디다 보니 벌써 가을이 왔다. 어쩌면 우리 삶의 어떤 고난들도 이렇게 지나가리라는 걸 믿어본다.

이 가을, 잠자리에 두고 읽고 싶은 시조집이 있어 소개해본다. 우리 민족의 정형 시조를 붙잡고 40년 훌쩍 넘게 외길을 걸어온 민병도 시인의 일역日譯 시조집 '청동 물고기'이다.

"부처님 출타중인 빈 산사 대웅전 처마/ 물 없는 허공에서 시간의 파도를 타는/ 저 큰 눈 청동물고기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뼈는 발라 산에 주고 비늘은 강에나 바쳐/ 하늘의 소리를 찾아 홀로 떠난 그대 만행卍行,/ 매화꽃이 울 때마다 경經을 잠시 덮는다/ 혓바닥 날름거리며 등지느러미도 흔들면서/ 상류로, 적요의 상류로 헤엄쳐 가고 나면/ 끝없이 낯선 길 하나 희미하게 남는다"-'풍경'전문

저자는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우리 민족사에 '시조'라는 정형시가 있다는 자긍심이 시조에 입문한 동기였다고 한다. 시조시인이자 한국화가인 그는 '예술가는 시대를 진단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치유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의 목적성이다'라고 말한다. 그중 시조는 '시대를 진단하고 내리는 처방전이며 침 같은 것이다'라고 역설한다.

'시조는 700년이 넘는 역사성과 3장 6구 12음보라는 특유의 정형성을 지닌 세계적 자산입니다. 눈부신 문학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구문학의 그늘에 상당 부분 가려져왔습니다. 이제 그 품격에 걸맞은 자리매김이 필요한 때라고 여겨집니다. 다만 번역의 한계성 때문에 시조 양식이 지닌 특유의 정제미를 오롯이 전하기 어렵다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번 일역 시조집의 발간이 시조의 국제적 이해도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일역日譯 시조집을 기획한 것은 와까(和歌)와 하이꾸의 정형성과의 차별성을 공유하고 싶은 까닭입니다. 어쩌면 東亞 정형시의 새로운 방향성 모색에 단초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감인지도 모르겠습니다.'-시인의 말 중에서

'허구한 날/ 베이고 밟혀/ 피 흘리며/ 쓰러져 놓고/ 어쩌자고/ 저를 벤 낫을/ 향기로 감싸는지/ 알겠네/ 왜 그토록 오래/ 이 땅의/ 주인인지'-'들풀' 전문

들풀도 하나의 생명체이지만 농사꾼에게는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 잡초는 베어 없애야 한다. 들풀은 그래서 허구한 날 베이고 밟혀 피 흘리며 쓰러진다. 행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풀을 밟고 지나간다. 그런데 놀랍게도 들풀은 저를 벤 낫을 향기로 감싼다. 자기를 죽여 인(仁)을 이룬 것이다. 시인은 들풀의 의미를 백성으로 받아들인 것이리라. 이것이 우리의 가락인 시조의 맛과 멋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시조는 종갓집이다'라는 표현을 들은 적 있다. 세계화 시대에 부응하여 우리 민족의 시조도 이제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 발을 넓혀 나감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염원이 '청동물고기'로 나타난 것이리라.

오는 10월 청도에서 국제시조 대회가 개최된다고 한다. 어려운 행사의 깃대를 잡고 작가는 오늘도 밤을 하얗게 새우며 창작과 행사의 구상에 고민하고 있다.

그의 시조 사랑은 시공을 넘어 영원할 것이다. 빈 산사를 떠나, 먼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어 힘차게 퍼덕이며 헤엄쳐가는 청동물고기처럼.

올가을엔 누구나 시인이 되어봄이 어떨까. 내 몸속에 흐르고 있는 유구한 정서를 뽑아내어 저 풀벌레처럼 계절을 노래하면 어떨까. 시집을 가만히 가슴에 묻는다.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