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세계 전환 시도하다 좌절 후
- 소녀와 길고양이 이야기 담은
- '개나리숲의 흰 양말' 펴내

부산 남구 감만동 감만창의문화촌에는 부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예술가 입주 공간이 있다. 한정기(사진) 동화작가는 2014년과 2015년 여기 입주해 "하루 8~10시간씩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야 마음이 놓이던"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 12월 31일 '감만'에서 나왔습니다. 규정대로라면 더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다른 예술가들께도 이 괜찮은 공간을 쓸 기회가 돌아가야 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집중해서 구상하고, 글쓰기에 '감만'은 환경이 좋았다"고 말했다.

'감만'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데가 있는 지명이다. 칠 감(戡), 오랑캐 만(蠻). '오랑캐를 쳐서 이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온 힘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남도 나도 '쳐서 이길 수' 없으므로 예술가가 작정하고 들어앉아 맹렬히 작업하는 장소로 이름이 딱 어울린다. 올해 등단 20년을 맞은 부산의 중견 동화작가 한정기는 거기서 무엇에 집중했을까.

"세계 최대의 원자력발전소 밀집지역(부산 울산 경주 울진)에 사는 동화작가로서 핵의 위험을 일깨우고 미래세대의 안전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는 건 작가의 책임이라 생각해요. 그런 뜻을 담은 '미래 SF 청소년 소설'을 쓰려고 2년 동안 무척 애를 썼죠." 2년 동안 매주 서울을 오르내리며 판타지 창작 공부를 하면서 그는 작품 세계의 전환을 시도했다.

생활동화부터 해양문학까지 다채로운 작품을 써온 한 동화작가의 대표작으로 장편동화 '플루토 비밀결사대'(전 5권)가 꼽힌다. 이 작품은 2014년 EBS가 14부작 어린이 드라마로 방영했다. 이렇게 볼 때, 그가 '감만'에서 새로 시도한 신작 '미래 SF 청소년 소설'은 작품세계의 큰 전환을 겨냥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엎었다. "장편 두 권 분량의 작품을 썼는데 도저히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괴로웠죠. 내 그릇이 이거밖에 안 되는구나 싶고. 당장 성과를 못 냈으니 허탈하고. 몸도 아팠어요."

그렇게 마음과 몸이 아플 때 자기를 치유하듯 쓴 동화가 바로 최근 낸 '개나리숲의 흰양말'(어린른이 펴냄)이다. 이 작품은 수더분한 겉모습의 가방을 열었더니 속에 작은 보석이 들어 있는 느낌이다. 속 깊은 초등학생 민서와 길고양이 '흰양말'이 주인공이다.

어딘지 익숙한 '소녀와 길고양이'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면, 당신은 이제 막 수더분한 겉모습의 가방을 열었을 뿐이다.

민서 엄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 민서를 잘 돌볼 수 없다. 민서가 가끔 '나는 잡초가 아닐까' 생각하는 이유다. 민서가 시장통 엄마 점포에 들러 흰양말에게 줄 통조림을 얻어가던 날, 민서는 문득 깨닫는다. "엄마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갓 낳은 새끼를 돌보려고 온 힘을 다하는 흰양말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본다.

"흰양말도 최선을 다하는 거구나."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누굴까. 호되게 어려운 시간을 겪은 한정기 동화작가 자신에게도 이 말을 그대로 들려줄 수 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반려동물의 도움을 받아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이나 민서가 흰양말 가족을 만나려고 개나리숲을 통과하는 장면 등은 인상 깊다.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