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 중심 속 신하들 무한 경쟁
- 말단 관리로 시작해 정권 장악
- 인사·세금 문제 등 과감한 손질
- 사후 가치 훼손돼 현재 재조명

중국 춘추시대 약소국 정나라를 강소국 반열에 올려놨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자산(子産)이나 구석지고 거친 변방의 진나라를 초강대국으로 변신시킨 상앙(商앙)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현대의 정치와 개혁을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크게 된다.

	명나라 황제 신종이 조정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는 모습. 베이징고궁미술관에 소장된 서현경의 ‘환적도(宦迹圖)’라는 그림이다. 더봄 제공

하지만 2000년 전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여서 독자에 따라서는 우화나 옛이야기로만 여기고 현실감이나 엄밀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중국 명나라 후기의 개혁 정치가 장거정(張居正·1525~1582)의 일대기를 엄밀하면서도 생생하게 담아낸 장거정 평전은 그럴 우려에서는 멀찍이 벗어나 있다.

이 책이 다루는 시대가 춘추전국시대보다는 한참 ‘최근’인 명나라 후기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저자 주둥룬(1896~1988)의 치밀한 서술과 엄정한 해석이 절실한 현실감과 활력을 느끼게 한다. 주둥룬은 당나라의 차(茶)의 명인 육우, 시성(詩聖) 두보, 북송의 시인 매요신 등에 관한 유명한 전기를 쓴 중국 문단의 전기 작가로 널리 알려졌다.

장거정은 냉혹한 질서, 무수한 변수, 엄청난 경쟁자들 속에서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고 10여 년에 걸친 투쟁 같은 노력 끝에 끝내 개혁에 성공한 정치가이다. 이 책에서 인상 깊은 대목은 한 발짝 잘못 디디면 정치적 실각이나 가혹한 실패에 직면하기 십상인, 숨 막히게 살벌한 명나라 황실의 정치 환경이다. 명나라의 정치제도 아래서는 과거에 급제하기는 지극히 어렵고, 막상 어렵게 관료가 되었다 해도 소신껏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곤장 100대를 맞고 사망하거나 평민으로 강등되는 식의 일이 숱하게 벌어진다.

정치 질서 자체가 황제 중심으로 형성됐고, 신하들 사이의 경쟁은 상상 이상으로 치열한 환경. 장거정은 말단 관리로 시작해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차근차근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간다. 명나라 목종이 죽고 10살의 어린 황제 신종(만력제)이 즉위하면서 마침내 권력을 틀어쥐는 장거정은 하나하나 개혁 정책을 펴나간다.

관료의 1년 업무 결과를 평가해 인사에 반영한 고성법은 당시 당파와 문하생 중심의 관료체제에 엄청난 충격을 주면서 정부 시스템에 활력을 가져왔다. 곡물 등 현물로 걷던 세금과 백성이 직접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던 요역(취로사업)을 은(銀)을 납부하는 것으로 통일한 일조편법 시행은 국가 운영의 효율을 높이고 백성의 부담을 덜었다. 전문가를 과감히 등용해 치수 사업을 완수하고 국방을 튼튼히 했다.

책은 장거정을 좋은 면만 있었던 이상적인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현실 정치에서 살아남기 위한 쟁투를 결코 마다하지 않으며, 실수도 하고 때로 개인적 욕심도 부리는 모습을 명기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정치를 이해한 상태에서 개혁정치에 도전해 끝내 성공한 드문 정치인이다. 그의 개혁으로 명나라의 수명은 70년 이상 늘어난 것으로 평가된다.하지만 장거정이 죽자마자 신종은 마치 억눌렸던 복수심을 터뜨리듯 그의 개혁을 모두 철폐해버린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장거정이 선보인 새로운 시스템과 개혁에서 성공한 기억은 그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다.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