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이 고향인 시인 김상미가
- 14년 만에 네번째 시집을 냈다
- 그를 해운대로 불러내렸고
- 그는 흔쾌히 달려와주었다
- 많이 아플때 울면서 쓴 시인데
- 나중에 읽으니 아프지 않더라며
-“시가 저 혼자 익어서
- 열매를 맺었다”고 말했다

한 시인의 페이스북에서 김상미 시인의 4번째 시집 출간 소식을 접했다. 김 시인에게 시집 선물을 받은 시인이 책 표지와 함께 축하와 반가움의 메시지를 올린 것이다. 짙은 녹색 표지에 흰 글씨의 제목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가 도드라져 보였다. 시집 출간 축하 인사말 가운데 재미있는 댓글이 하나 있었다. “아무 관계도 아닌데 왜 시집을 보낸 거죠? 하하하”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말은 특별하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토라진 애인의 투정 같기도 하고, 단호하고 서늘한 선언처럼 서운하게 들리기도 한다.시집을 빨리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세상과, 또 사람들과 어떤 관계일까. 그를 불러내기로 했다. 김 시인은 서울에서 해운대로 달려와 주었다.

김상미 시인은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1990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를 냈고, 2003년 박인환문학상을 받았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는 세 번째 시집 이후 14년 만에 내놓은 반가운 시집이다.

김상미 시인이 새 시집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를 내놨다. 김 시인이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새 시집을 발간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추억의 해운대에 다시 선 소녀

“해운대는 추억이 많은 곳이죠. 고등학교 2학년 때 파도 소리가 듣고 싶어 가방을 학교에 둔 채 몰래 빠져나와 해운대로 달려온 적이 있어요. 1시간만 바다를 보고 가려 했어요. 도착하자마자 바다만 바라봤는데, 1시간이 금세 지나가지 뭐에요.”

바다를 바라보는 그에게서 여고생의 모습과 말투가 언뜻 보였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그 여고생 앞에 다른 학교의 학생 주임이 나타나 그의 단 한 번의 일탈은 들통이 났단다. “한 번이었는데, 내가 수업 땡땡이치고 해운대에서 시간을 보낸 적이 많다는 소문이 왜 났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내면에는 아직 소녀가 남아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 시인들도 나를 부를 땐 누나라고 불러요.”

바닷가를 걷던 그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해운대 해변 끝에 자갈이 많았는데, 파도가 그 자갈 위로 덮쳐와 자그락 자그락 바다로 돌아가던 그 소리가 정말 좋았는데, 이젠 자갈도 없고 모래사장도 짧아졌네요.” 변해버린 해운대가 못내 서운한 모양이다.

예약해 둔 숙소에 여행 가방부터 가져다 놓기로 했는데, 시인과 필자는 길을 찾지 못해 한동안 헤맸다. 그러는 동안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에 수록된 시 ‘너무 많은-끝말잇기’가 생각났다. “너무 많은 상점들과 상점들/상점들 안의 너무 많은 상품들/상품들을 고르며 웃고 우는 너무 많은 손들/손들 하나하나가 안간힘으로 움켜쥔 너무 많은 욕망들/욕망들 속에 도사린 너무 많은 함정들”로 시작되는 시다. 너무 많은 높은 건물과 광고판, 간판들이 만든 함정에 빠져 시인은 해운대 거리를 한참 동안 걸었다.

■독립국가에서 세상을 향해 말하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김상미 문학동네/2017

오랜만에 신작 시집을 펴낸 시인은 “첫 시집을 냈을 때만큼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긴 시간이었죠. 14년. 그 사이 시단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고, 어떤 시가 좋은지도 모르겠고…. 그 와중에 컴퓨터가 말썽을 일으켜 써둔 시가 다 날아가는 참변도 있었죠. 지나간 잡지와 파일을 뒤적이면서 시를 찾아 모았어요. 몸도 마음도 아팠을 때 쓴 시들이에요.”

교정을 보면서 스스로 놀랐다는 고백도 했다. “울면서 쓴 시도 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그렇지 않더라구요. 시가 저 혼자 익어서 열매를 맺은 것처럼요.”

저 혼자 익어가는 시이지만 그 시를 쓸 때는 시인도 혼자다. 혼자인 동안은 고독하다. 그의 고독을 짐작해볼 수 있는 시 ‘독립국가’가 시집에 실려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신적 존재로 고독하게 살아온 중국의 황제가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한 시인을 보면서 느낀 마음이다. 쓸쓸하고 아름다운 옛이야기 같은 시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그는 대국의 시인, 나는 대국의 황제./우리는 단번에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를 이해했다.//나는 황제로, 그는 시인으로 죽을 때까지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뼈저린 고독 속에서 홀로 살아야 하는 가혹한 운명이란 것을. 어쩔 수 없이 모두에게서 고립된 하나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독립국가라는 것을!”

대국의 시인은 짐작하다시피 중국 최고의 시인 이백을 염두에 두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백석 시인의 시에서 구절을 인용했다. 독립국가로 살아가는 시인들, 그 국경을 살짝 넘어가 보는 기분이다. 시집을 제값 주고 사서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그래도 시적 충성심 가득한 백성으로 그 국가를 섬기고 싶은 마음도 들게 한다.

저 혼자 무르익은 김상미의 시는 끊임없이 다양한 감정과 표현으로 세상을 향해 말을 걸어온다. 그는 “나를 보여주기가 아니라 나를 보이게 시를 쓴다”고 말했다. 이 시집에서 우리가 그를 얼마나 알아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시집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김상미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너는 잘 지내?” 솔직하게 다가오는 그 말에 무장해제되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시인과 이미 특별한 관계를 맺은 것이다.

책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