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운동가 아버지 둔 재일동포 정조문

- 조선 문화재 1700점 수집 미술관 개관

- 한반도 통일 바라며 명칭 ‘고려’로 지어

일본 교토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윤동주와 정지용 시인이 공부했던 도시샤 대학의 기념비 앞에 헌화하고 정해진 길 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교토는 일본 헤이안 시대(794~1185)의 수도로,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처럼 도시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입니다. 수많은 유적지와 박물관이 도시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큰길 안쪽으로 익숙한 한자가 섞인 이정표가 보였습니다. ‘고려’란 낯익은 이름이 아니었다면 그냥 스쳐 지났을지도 모를 작은 미술관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와를 얹은 돌담과 입구의 무인상, 그리고 담 너머로 보이는 정원의 오층석탑은 그곳이 작은 한반도임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고려미술관을 세우고 평생 일본에 흩어져 있는 조선 문화재를 수집한 정조문의 사진.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최선일 박사 제공

고려미술관을 세운 이는 재일동포 정조문(1918~1989)입니다. 그의 아버지 정진국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이력으로 일제의 심한 감시를 받게 되고 생계까지 어려워지자 가족을 데리고 일본, 교토로 건너갑니다. 1925년, 그때 정조문은 여섯 살이었습니다. 빈곤한 살림 속에 소학교를 간신히 마친 정조문은 30대에 시작한 파친코 사업으로 타국에서 기반을 다지며 사업을 확장해 나갑니다. 어느 날 고미술 거리를 산책하던 그는 운명처럼 만난 조선의 백자 항아리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일 년간 월부로 갚기로 하고 조선백자를 산 정조문은 그때부터 일본 속의 조선 문화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일본 내에 흩어져 있는 조선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계간 ‘일본 속의 조선 문화’를 창간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50호까지 발간하며 조선 문화재 수집과 기록에 매진합니다.

‘한반도 통일을 염원해 정말로 한국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고려미술관이든가 고려미술자료관 같은 것을 만들고 싶습니다.’(149쪽)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정조문은 생전에 반드시 미술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사재를 털어 자신의 집터에 건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백자 항아리를 만난 지 40여 년 만인 1988년, 고려미술관은 개관합니다. 소장품 1700점 모두 일본 내에서만 모은 조선 문화재란 점에서 미술관 건립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정조문은 개관식에서 말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온 세계 사람들이 우리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국제인이 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정조문은 미술관 개관 4개월 후인 다음 해, 1989년 지병으로 숨을 거둡니다.

‘분단된 조국에는 돌아가지 않는다’란 단호한 의지로 정조문은 평생 고국에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이 우리 조국으로 통일될 때까지 절대 귀국도, 방문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미술관 이름 ‘고려’에 북도 남도 아닌 한반도의 통일 왕조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담음으로써 그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킵니다. 하지만 그의 조국과 고향, 예천에 대한 그리움은 평생 소리 없는 울음으로 남았습니다. 정조문과 함께 쓰시마를 다녀온 작가 김달수의 소설 ‘쓰시마까지’에는 재외동포 정조문의 통한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정조문은 큰 소리로 울었다. 나라와 민족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정조문이 나한테 물었다. 모르지. 나는 대답했다.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지금 그것 때문에 울었다는 것뿐이야.’ 64년을 재일 조선인으로 살면서도 조국을 잊지 못해 한반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쓰시마 끝에 서서 조선해협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삭혔을 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렇게 가까운데, 우리는 왜 여기까지인가!’

교토역에서 버스로 40여 분 거리에 고려미술관이 있습니다. 교토 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좀 수고스럽더라도 꼭 한 번 들러보면 좋을 곳입니다. 작은 한반도가 거기에 있으니까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