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어주면 행복해하던 한나
- ‘첫사랑의 비극’을 안긴 그녀가
- ‘인류의 비극’으로 돌아왔다

전라(全裸)의 연인이 욕조에 있습니다. “잘하는 걸(You are good at it).” 여자가 칭찬합니다. 뜨겁게 사랑한 직후입니다. 남자가 능청스레 묻습니다. “잘하다니 뭘(Good at what)?” 여자가 연인의 얼굴에 물을 튕기며 받아칩니다. “책 읽는 거(Reading).”

그림=헌즈 작가

여자 한나는 36세의 전차 검표원, 남자 마이클은 15세 고교생. 때는 1958년, 무대는 독일. 빗속에서 성홍열을 앓던 마이클을 한나가 도와준 게 인연이 돼 연인 사이로 발전한 것입니다. 날마다 만나 사랑에 눈떠가는 마이클은 한나가 첫사랑입니다.

이들을 갈급하게 가까이 이어준 건 책 읽기입니다. 명문고생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면 한나는 꿈꾸듯 행복해합니다. 독서 목록도 다양합니다. 호머의 ‘오디세이’,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마이클이 찰스 디킨스 소설 ‘오래된 골동품 상점’을 읽어줄 땐 한나가 서럽게 웁니다. D.H. 로렌스 작 ‘채털리 부인의 사랑’ 속 성애 장면을 읽어주면 “불결하다” 하고선 계속 읽으라며 재촉도 합니다.

그들의 의식은 늘 ‘섹스 먼저, 책 읽기는 그다음’ 순서입니다. 그런 룰을 한나가 바꿉니다. “이제부터 책을 먼저 읽어줘. 섹스는 그다음에(Read to me first. Then we make love).”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복선으로 기능합니다. 그 이유는 가려둡니다.

한나를 향한 마이클의 사랑은 독백 형식으로도 우리의 귀를 잡아끕니다. “난 무엇도 두렵지 않아. 고통이 커질수록 내 사랑도 커가지. 하나님은 말씀하실 거야. ‘영혼을 완전히 채워주는 유일한 하나는 오직 사랑뿐(Only one thing can make a soul complete, and that thing is love)’!”

영화는 이 독백의 원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 설정 또한 복선입니다. 독일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가 지은 ‘간계와 사랑(Intrigue and Love)’의 한 대목인데요, 귀족 가문 아들과 가난한 악사의 딸이 사랑하다가 간계에 의해 불행해진다는 내용입니다. 마이클과 한나의 사랑에 비극적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임을 암시하지요.

연인은 여행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한나의 심경이 소용돌이처럼 일렁입니다. 교회에 들어간 한나가 아이들의 합창을 들으며 소리 죽여 흐느끼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이클은 연인의 표정을 감동에 젖은 모습이라고 여겨 사랑스레 바라봅니다. 그들의 사랑은 ‘고통이 커질수록 사랑도 커간다’는 독백대로 아직까지는 오래 이어질 것만 같아 보입니다.

영화의 반을 지나왔군요. 친구들이 마련해준 생일 파티를 사양하고 한나에게 달려가는 마이클. 때마침 직장에서 희소식을 듣는 한나. 검표원 대신 사무직에 발령 받은 건데요, 기뻐해야 할 승진인데 한나는 몹시 혼란스러워합니다. 왜일까요. 그날의 사랑을 끝으로 한나는 홀연히 떠납니다. 한 줄짜리 글도 안 남기고 떠난 연인을 그리며 오래오래 아파하는 마이클….

1966년, 법학도 마이클이 전범자 재판을 참관하러 법원에 와있습니다. 피고인 이름이 호명되는군요. 순간, 귀를 의심하며 마이클이 얼어붙습니다. 옛 연인 ‘한나 슈미트’의 이름을 들은 것입니다. 1943년, 독일 친위대에 들어간 한나가 무슨 죄목으로 법정에 선 건지 판사가 조목조목 나열하는 사이 마이클은 숨통이 조여드는 고통을 느낍니다.

플래시백 방식으로 사건을 재현해보기로 합니다. 한나는 유대인 포로 감시원에 지원합니다. 아이들도 낀 포로들을 아우슈비츠에 이송할 무렵 야간 폭격이 개시되고, 감시원 한나는 포로 300여 명을 급히 교회에 대피시킵니다. 건물이 불타고 문은 밖에서 잠겨있습니다. 한나는 상부 명령에 따라 문을 따주지 않습니다.

다시 현재. 재판관은 사건 당시의 보고서에 적힌 한나의 필체가 본인 것인지 확인하려 합니다. 그런데 한나가 필적 감정에 응하지 않는군요. 마이클은 그제야 깨닫습니다. 책을 읽어주면 한나가 왜 그토록 행복해했는지. 여행지의 교회에서 합창을 듣던 그녀가 왜 흐느껴 울었는지…. 한나는 까막눈입니다.

문서에 서명하라 하니 했고, 명령하니 따랐을 뿐이라고 밝히면 감형 받을 수도 있건만 한나는 끝내 그러길 거부합니다. 전범자를 사랑했다는 죄의식은 끝내 마이클을 증인으로 나서지 않게 막습니다. 한나는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습니다. 스티븐 달드리가 만든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는 문맹자로 상징되는 ‘사유하지 않는 자’의 악의 평범성에도 카메라를 들이댑니다.

1980년. 한 줄짜리 문장이 담긴 한나의 편지가 마이클에게 도착합니다. ‘저번 것들 고마워. 정말 마음에 들었어(Thanks for the latest. I really liked it).’ 한나는 어떻게 문맹에서 벗어나고 있는 걸까요. 과연 마이클이 ‘저번에 보내 준 것들’이란 무엇일까요.

2016년 말. 한 도립도서관장이 제게 문의해왔습니다. “시민에게 영화를 보여주고 원작을 읽게 하려는데 추천 좀 부탁해요.” “성장영화 ‘책 도둑’을 권합니다.” “책을 훔쳐요?” “2차 대전 중 독일군이 책을 분서(焚書)할 때 문맹 소녀가 빼돌려 읽으며 눈을 떠간다는 이야기예요.” “그래도 책을 훔치는 내용은 교육상 안 좋겠어요. 다른 작품은요?”

도립도서관장의 반응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 관둘까 하다가 추천해봤습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을 각색한 ‘책 읽어주는 남자’는 어떨지요?” “어떤 작품이죠?” “삼십 대 문맹 여자와 책 많이 읽는 고교생의 사랑 이야기예요.” “사랑을 한다고요? 비극이라고요? 해피엔딩 영화는 없나요, 네?”


‘책 읽어드립니다.’ 이 광고를 본 독자들이 각자의 욕구를 채우려고 광고한 여인을 찾는데…. 레몽 장의 소설 ‘책 읽어주는 여자’를 ‘함께 읽을 책’으로 추천합니다.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