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2049’는 기술 문명이 고도로 발전했지만 온통 폐허로 변한 미래의 어떤 시기를 다룬다. 사이버 펑크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블레이드 러너’(1982)로부터 한 세대 지난 뒤의 이야기. 식량 문제를 해결한 초국적 기업 월레스사는 유전공학 회사 타이렐사의 유산을 인수해 ‘레플리컨트’라 불리는 복제 인간의 새로운 모델을 생산하는 한편, ‘블레이드 러너’라 불리는 현상금 사냥꾼들은 반란을 일으킬 위험을 가진 구세대 레플리컨트를 찾아내 처형한다. 통제를 벗어난 레플리컨트를 사냥하던 K는 한 여성 레플리컨트 유골에서 출산의 흔적을 발견하고, 태어난 아이의 존재를 추적하면서 의외의 진실과 마주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한 장면. 소니픽쳐스엔터테인먼트 제공

동일한 기억을 주입하고 사는 복제 인간이라는 영화의 모티브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과 궤를 같이 한다. 인형(人形)이 된 사람들. 근대 사회는 인간들에게 한 사회 시스템의 성원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지시하는 프로그램을 몸과 마음이 각인하도록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주입한다. 가정에서 학교, 군대, 직장 등에 이르는 일련의 사회화 과정은 신체의 습속을 바꾸고 주류 이데올로기, 질서와 규범을 습득해 나가는 공정이며, TV와 영화, 책과 같은 매체를 접하면서 외부로부터 나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형성해나가게 된다. 세뇌에 가까운 기준선 테스트를 받는 K의 모습처럼, 자본주의 국가의 시민으로 사는 일상은 그 자체가 순응적인 구성원을 양성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그래밍인 것이다.

구조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1918~1990)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서 의식을 조작함으로써 개인을 통제하는 이런 근대사회의 속성을 두고 ‘호명(interpellation)’이라 부른 바 있다. 기억의 복제와 조작, 사회화는 알튀세르가 말하는 ‘호명’을 기술적 상상력으로 비튼 철학적 은유이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고, 타자의 기억과 목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 채 사는 레플리컨트와 국가와 자본의 목적에 복무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된 실제 인간 사이의 경계는 흐려져 있다. 인간들은 레플리컨트인 K를 두고 껍데기(skinner)라 모욕하지만 원본과 복제,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무너져버린 포스트 모던의 우주에선 아무 의미가 없다. 모두가 껍데기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상태로부터 빠져나올 방법은 없을까? 빗속을 터덜터덜 걸어가던 K가 전광판의 광고를 보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장면은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K는 원본을 지키기 위해 위장된 복제이고 홀로그램 연인 조이는 기업의 제품에 지나지 않지만, 자의로 명령을 거부하고 선택과 행동, 경험과 감정을 통해 꼭두각시 인형을 넘어선 인격적 주체가 된다. 데커드의 딸 스텔라가 복제 인간의 기억을 제작하는 프로그래머이자 월레스사의 하청업자로 살아가는 것과 원본을 넘어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 K는 아이러니한 대조를 이룬다.

영화는 한 인간의 진정한 인간성이란 그가 태어난 기원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과 행동에 있다는 ‘블레이드 러너’의 명제를 새롭게 재현한다. 이로써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관을 넘어 심층에 자리한 철학까지 이어받은 훌륭한 계승자가 되었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