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사일 돕기를 싫어하던 소년은
- 이제 매일 새벽 5시 농장에 간다
- 살아나는 생명들과 대화하며
- 지울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 고단한 세상살이를 견뎌낸다

“첫사랑이 암소였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아침에 일어나면 소에게 먹일 꼴을 베는 것으로 시작해 소 먹이는 일에 매달려야 했던 유년시절 이야기였다. 창원예총 회장을 맡고 있는 김시탁 시인의 사무실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고향으로 이어졌다. 그의 시를 이루는 바탕에는 고향이 있었고, 단숨에 눈앞에 펼쳐졌다. 창원시 용지동 창원문화원 4층의 창원예총 사무실에서 내려다보는 풍경도 한몫했다. 용지동 가로수길에는 메타세쿼이아의 푸르름이 끝없이 이어지고, 다른 나무들도 녹음을 자랑하고 있어 숲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창원문화원 뒤에는 용지어울림동산, 창원농업기술센터 식물관도 있다. 나들이 오는 시민, 창원을 찾는 외지인도 즐겨 찾는 곳이다.

김시탁 시인이 경남 창원시 의창구 용지동 가로수길에서 시집 ‘어제에게 미안하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그림과 문학을 사랑하다

김시탁 시인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에서 태어났다.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있죠. 당시 강원도 등지에서 벌목한 소나무를 춘양역에 집결해 이송했는데, 그 소나무들이 궁궐을 짓는 데 쓰이는 유명한 목재 금강송이라고 해요. 그런데 다른 지역 소나무를 춘양목으로 둔갑시켜 억지를 쓰는 바람에 억지 춘양이라는 말이 나왔죠.” 고향 지명을 설명하는 목소리에 애정이 담겨있다. “어렸을 때는 그림이 좋았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른들은 모두 일하러 나가고 집이 비어있었지요. 혼자 툇마루에 앉아 할머니와 부모님을 기다리다 보면 배가 고파 눈물이 났어요. 툇마루에 뚝뚝 떨어진 눈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림과 가까워져 보이는 사물을 모두 그렸어요. 생각해보면, 그림이 제 마음의 고향이었던 겁니다.”

어제에게 미안하다 /김시탁·2017·경남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전국 미술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았다. 장손에 맏이인 터라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계명대 미술대학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대구 미도극장 간판을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했을 만큼 재능이 많았다. 고교 때 국어교사에게서 “글재주가 있다”는 칭찬을 받던 그는 그림을 전공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썼는데, 그때 쓴 글 하나가 문제가 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방황과 굴절의 나날이 이어지며 결국은 대학마저 포기하게 됐다. 그림을 사랑했던 학창시절은 그렇게 뜨겁게 지나갔다.

경남 창원으로 온 그는 창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창원에서 살면서 문학의 꿈을 걷던 그는 반가운 인연을 만났다. 고교 시절 그 국어교사를 다시 만나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2001년에 ‘문학마을’로 등단했고, 첫 시집 ‘아름다운 상처’를 발표했다. 이후 ‘봄의 혈액형은 B형이다’ ‘술 취한 바람을 보았다’ ‘어제에게 미안하다’를 냈다. 2015년 ‘경남문학 우수작품집상’ ‘경남 올해의 젊은 작가상’, 2016년 ‘창원시문화상’을 받았다. “시는 서정을 바탕으로 합니다. 독자가 의미를 알 수 있어야 하고, 읽혀져야 하고, 마지막 연을 읽고 나서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감동이 있어야죠, 그런 시를 쓰려 노력합니다. 저 역시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나면 온종일 기분이 좋습니다. 시의 힘은 강합니다.”

■고향과 흙냄새가 배인 시(詩)

시집 ‘어제에게 미안하다’는 그가 사랑하는 흙냄새가 어디서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시가 많다.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는 것을 무던히도 싫어했지요. 그런데 도시에 살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북면에 농지를 사서 3년간 화전을 일구는 마음으로 돌을 주워내고, 호미와 삽을 들고 흙을 뒤집고 과실수와 작물을 심어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저더러 농사에 무슨 한이 맺힌 사람처럼 일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토록 싫어했던 농사였는데, 이제는 땅이 저를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매일 오전 5시에 농장에 간다. “농장 옆에는 낙동강이 흐릅니다. 새벽에 잡초를 뽑다 보면, 건너편 산을 휘감고 있던 운무가 슬금슬금 강으로 내려옵니다. 마치 덜 마른 동양화 한 폭처럼 젖어있는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시 ‘농장일기·6 - 잡초’를 읽어보자. “풀을 뽑는다/ 텃밭 고랑에 군락을 이룬/ 잡초를 뽑는다/ 죄라면 내 양식 가까이/ 스스로 생명을 내린 것/ 내 양식의 영양을 공유한 것/ 그것이 제거되어야 할/ 뿌리째 뽑혀야 할 명분이다/ 풀을 당겨보면 완강하다/ 흙을 놓지 않으려 기를 쓰고/ 흙도 풀을 끌어당긴다./ 그래도 어림없다/ 자수성가한 놈의 목을 비튼다/ 비명을 지르며 흙덩이가/ 눈물처럼 툭툭 떨어졌다.” 밟을수록, 뽑을수록 기승을 부리며 살아나는 생명에게 시인이 바친 시다. “풀을 뽑을 때 흙과 뿌리의 비명이 들립니다. 시인은 그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물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대화하지요. 그러면 덜 핀 꽃이 떨어지는 것도, 꽃을 받는 땅의 아픈 마음도 볼 수 있습니다.”

‘가을소묘·2’에서는 고향과 부모님의 기억이 선명하다. “엄니는 거름 자리 개똥을 배추밭으로 퍼 나르고/ 아비는 끝물 고추 말뚝을 뽑는다”로 시작한다. 시집에서 흙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우리 마음에도 고향은 살아있는 것이다. 그곳은 특정지역이 아니다. 고단한 세상살이를 견디는 힘의 원천이며, 쉽게 지울 수 없는 짙은 그리움이다. 김시탁 시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고향 선배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