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음기, 영화, 타자기’는 국내 독자에게 다소 생소한 책이다. 이 책 홍보 자료에 저자 프리드리히 키틀러(1943~2011)는 독일 ‘매체 이론가’로 소개돼 있다. 이 책을 첫 장에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

이 한 문장이 사실상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56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끌고 간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역사를 매체사로 다시 기술했다. 저자는 최초의 아날로그 기술 매체들의 태동기였던 1900년대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면서 새로운 기술 매체들이 가져온 혁명적 변화를 조명한다. 새로운 기술 매체는 바로 축음기, 영화, 타자기다.

저자가 축음기, 영화, 타자기에 주목한 이유는 ‘문자 독점’ 체제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문자는 ‘독점적’ 기록 체계로 19세기에 꽃을 피운다. ‘독점적’이란 단어는 문자가 일부 계층 또는 계급에서만 사용됐다는 뜻이다. 그러다 1877년 12월 6일 토머스 앨바 에디슨이 축음기의 원형을 선보이면서 새로운 기록 체계가 등장하게 된다. 여기서 특히 관심을 기울일 대목이 있다.

“축음기와 영상기록기에 이르러 비로소 저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시간은 청각적인 것에서는 소음의 주파수 혼합체로, 광학적인 것에서는 연속되는 단일 이미지들의 운동으로 저장되었다.”(17쪽)

새로운 기술 매체는 문자가 결코 하지 못했던 것, 바로 시간을 저장할 수 있게 했다. 이 부분이 핵심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매체 기술의 변화와 발전 과정에서 주체는 인간이 아닌 기술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즉 인간 중심적으로 매체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전체를 ‘정보의 저장, 전달, 처리 과정’으로 사유한다.

이런 내용이 낯설면서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흥미로운 부분도 적지 않다. 가령 타자기가 만들어져 여성 타이피스트가 등장하면서 남성의 특권이었던 문자 독점이 무너진다. 또 타자기로 인해 적지 않은 학자나 문인이 도움을 받았다. 니체는 눈의 질병으로 교수직을 사임했는데 타자기 덕분에 집필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고 1882년 3월 ‘베를린 일간신문’이 보도했다. 김희국 기자 kuki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