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화 작가가 해운대구 달맞이길 AID아파트의 철거 직전 모습을 기록한 사진 작품 ‘세월’.

수직으로 규격화된 집을 쌓아 올려 만든 아파트는 부족한 주택 공급 문제를 해결해주고 남부럽지 않은 주거생활을 누리게 해준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는 부동산 정책이나 개발 호재에 따라 순식간에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이 붙는 투기의 대상이 돼버렸다. 이런 아파트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켜켜이 쌓인 양피지이자 거주공간으로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전시들이 부산에 마련됐다. 작가들은 이미 사라진 아파트를 사진으로 되살려내거나 곧 사라질 아파트를 화폭에 담는가 하면, 가상의 아파트를 그려냈다.

박정화 작가는 오는 31일까지 해운대구 레이어드에서 8년 전 철거된 달맞이길 AID아파트를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사진전 ‘기억 저편’을 연다. 1975년 미국의 대외 원조 기관인 국제개발처(AID)로부터 차관을 받아 지어진 탓에 ‘AID’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근에 거주했던 작가는 2008년 1월부터 1년 3개월 동안 아파트가 철거되는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자동차도 떠난 아파트단지 도로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고양이, 녹슨 난간, 빈집을 표시한 우체통 등 흑백사진 속 아파트는 쓸쓸하다. 작가는 “사진으로나마 기억을 재생하고 부산의 예전 풍경을 복원시키려 했다. 기억이 묻어있는 주거공간이 지닌 가치는 엄청나지만 도시개발이나 경제적 논리로 인해 소멸되는 현실이 안타까워 카메라를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슬아 작가의 ‘208동’.

이슬아 작가가 바라보는 아파트에는 발랄한 색채가 가득 담겨있다. 그는 다음 달 2일까지 수영구 복합문화공간 코올액티브에서 남천동 삼익비치타운을 그린 개인전 ‘우리의 시간들’을 연다. 1980년 1월 광안리 해변 끝에 3060세대 규모로 들어선 이 아파트는 삼원색과 어우러진 흰색이 눈길을 이끌어 부산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재건축이 결정되면서 최근 몇달 새 값이 급등해 지역의 대표적인 투기 대상이 됐다. 작품은 아름드리로 성장한 나무 아래에서 쉬거나 걷는 사람, 동물 등 아파트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오래도록 간직해 온 풍경을 발랄한 색채로 풀어냈다. 아파트 주민이기도 한 작가는 “건물들이 사라지고 더 이상 주소를 ‘광안해변로 100’이라고 쓸 수 없게 될 순간이 언젠가 오겠지만 지금까지 보낸 소중한 시간을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홍성우 작가의 ‘APT-HV-2’.

두 작가가 사라졌거나 사라질 현실 속 아파트를 그리워 한다면, 홍성우 작가는 3D그래픽 프로그램으로 가상의 아파트를 그린다. 다음 달 23일까지 부산 금정구 디오티미술관에서 선보이는 ‘CITYSCAPE’전시의 아파트는 언뜻 보면 사진이라고 착각할 만큼 정교하다. 풀이나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아파트·빛·그림자로만 채웠다. 그럼에도 삭막함이나 쓸쓸함 보다는 아파트가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가 묘한 리듬감을 선사한다. 작가는 “아파트에 빛이 들어오는 풍경이 뭔가 새롭게 보였다”며 “지극히 인공적인 공간에 빛이 들면서 묘한 아름다움이 보였고 이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3D그래픽 프로그램으로 작업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권용휘 기자 rea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