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 한인 작가 시집 번역본

“‘소녀 배달’이라는 게 있었지 마치/농부가 농사지은 쌀을/관아에/갖다 바쳤던 것처럼. 나는 숨고 싶었지만/어머니가 나 대신 잡히면/어쩌지/집에는 어머니가 필요한데 어머니/어머니 나는 가기로 했어요/저들이 내게 일본에서 종군간호사로 일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김순덕, 64쪽)

재미 한인 작가인 저자는 시 35편을 책에 담았다. 고발 증언 고백 사후 등 4개의 챕터로 구성했는데,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역사부터 현존하는 차별과 폭력의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2018년 미국에서 먼저 출간됐으며, 이번에 우리말로 번역돼 소개됐다.

특히 두 번째 챕터인 ‘증언’의 연작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황금주 진경팽 강덕경 김상희 김윤심 박경순(가명) 김순덕 할머니들의 증언 필사본과 다큐멘터리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총 7개 작품으로 할머니들의 이름이 각각의 소제목으로 쓰였다. 피해자들의 독백처럼 읽히는 시들은 흐릿해진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한다.

내용만큼이나 눈여겨볼 부분은 작품의 독특한 배치다. 이 시를 제대로 읽으려면 책의 방향을 90도로 틀어야 하는 ‘작은 수고’가 필요하다. 또 단어, 문장 사이에는 불규칙한 공간이 많아 마디마디를 뚝뚝 끊어 읽게 된다.

모두 독자들의 읽기 경험을 ‘불편하게’ 하고 싶다는 시인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시가 가볍게 소비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의미도 있지만, 본인의 작업 또한 그만큼 쉽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는 장치다.

빈공간은 시인이 증언을 시로 옮기는 과정에서 선택적으로 뺀 단어들이자 역사 속 당사자들의 기억 속에서 삭제된 것을 나타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뿐 아니라 이기주의로 점철된 왜곡된 역사 인식, 이민자와 여성이 겪는 일상의 차별과 폭력, 세월호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도 실렸다. 독자들이 시를 매개로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느끼며, 공감해주길 바란다는 시인의 바람도 함께 전한다. 상처받고, 배제되고, 죽임을 당한 생명들이 끊임없이 ‘현재’에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그의 노력이 우리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민경진 기자 jnm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