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파묻힌 스발바르 종자저장고
- 전 세계 100만 종 5억개 보관
- 소행성 충돌해도 끄떡없는 시설
- 식량 위기 대비한 ‘노아의 방주’

‘종말의 날 저장고(doomsday vault)’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은 장소가 있다. 인류가 거주하는 곳 중 북극점에 가장 가까운, 춥고도 아름다운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종자 샘플을 들고 포즈를 취한 캐리 파울러. 왼쪽에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의 입구가 보인다. 마농지 제공

눈 속에 파묻혀 찾아내기도 힘든 외딴 바위산 속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가 그곳이다. 단단한 바위에 130ｍ의 터널을 뚫어서 만든 이 시설은 소행성과 충돌해도 견딜 만한 내진설계와 5중 잠금장치가 돼 있다.

연중 영하 18도의 기온을 유지하는 이 공간에서 보관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씨앗’이다. 세계 각국에서 맡긴 100만 종, 5억 개가 넘는 종자 샘플이 이 저장고에 냉동 보관돼 있다. 지구 종말이 닥쳐도 이곳의 씨앗만은 살아남아 인류의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언론은 ‘종말의 날 저장고’라는 별칭을 붙였다. 말하자면 작물 씨앗계 ‘노아의 방주’다.

가능한 한 많은 종류의 씨앗을 꽁꽁 얼린 채 수백 년, 수천 년 후에도 발아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스발바르 저장고. 캐리 파울러는 이곳의 설립 주역이자, 운영을 총괄하는 국제자문위원회 의장이다. 그가 이 저장고에 관한 책 ‘세계의 끝 씨앗 창고’를 썼고, 출판사 마농지가 이 책을 국내에서 펴냈다. 양장본 큰 판형에 페이지마다 실린 아름다운 스발바르의 사진만 보면 이 지역의 풍광을 담은 사진집 같기도 하다. (사실 그런 용도로 소장하고 감상하기에도 괜찮은 책이다.) 스발바르의 거주민이자 북극 사진으로 명성을 얻은 사진작가 마리 테프레가 모든 사진을 찍었다.

스발바르 여행기나 생태체험기처럼 시작한 책은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간다. 저자는 현재 선진국이 전혀 체감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위기, 머지않은 미래에 닥칠 식량문제의 심각성부터 거론한다. 현재 우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35만 종 이상의 식물 가운데 지극히 일부에서만 식량을 얻는다. 재배되지 않는 식물 종은 제거되거나 도태될 것이다. 쌀, 밀 등 현재 주요 식량자원이 기후변화 등의 이유로 멸종을 맞는다면 인류는 예상치 못했던 식량 부족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비록 지금 재배되지 않는 것이라 하더라도 현존하는 식물 유전자원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둬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작물 자원을 키워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의 노력으로 세계작물다양성재단 같은 국제기구도 생겨났다. 스발바르 저장고는 그런 노력의 가장 구체적인 결실인 셈이다.

바위산을 뚫어 저장고를 착공하던 순간부터 완공까지의 기록, ‘빙산의 일각’같이 눈 사이를 비집고 나온 신비한 입구에서 길고 긴 터널을 지나면 가 닿는 종자 보관실까지의 모습, 저장고를 설립하고 지켜내며 운영하는 사람들의 분투, 극한의 환경과 역설적인 아름다움, 북극여우를 비롯한 스발바르의 다양한 동물과 식물, 인근 주민의 삶까지 책의 모든 내용은 그저 기록물이 아닌 장엄한 서사처럼 느껴진다. 인류의 존속을 준비하는 이 얼어붙은 저장고의 사명 자체가 주는 무게감 때문일 수도 있다. 신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