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탄생


　 - 김길녀


　세 번의 겨울을 보낸 서울을
　떠나온 지 두 계절이 지났습니다
　헝클어진 마음 갈피에서 젖은 잎사귀들
　모아 서둘러 가을을 준비하는
　늦여름 숲에 펼쳐 놓습니다
　처음 만나는 문장 속 당신의 손은
　골짜기 끝 사과네 집 나무 평상에서
　풀잎 점을 치며 이른 저녁을 맞이합니다

　살고 싶어지는 오늘과 죽기 좋았던 어제는
　우리가 함께했던 광장의 흐림과 명랑처럼
　나무 우체통 위에 사이좋게 걸어둡니다



　 유고 시집 ‘누구도 시키지 않은 일’에서

	김길녀 시인.

<내 느낌으로 바라보기>

‘장소의 탄생’이란 시의 행간으로 들어가면 마음 다 비우고, 이미 그 마음속이 절간인 듯한 화자의 그림자를 만나게 된다. 어떠한 장소이기에 시의 머리 꼭대기에 이토록 경건한 생명을 부여한 것일까, 2연으로 나뉘어져 길지 않은 시에는 말의 군더더기라곤 없으며 절제된 행간 너머로 아득한 길 하나 열려있을 것만 같다.

‘세 번의 겨울을 보낸 서울’이란 장소에 해를 넘긴 횟수를 새기며 의미를 두는 것은 아마도 화자에게 어떤 일이나 사건의 발단이 된 장소일 것이다. ‘가을을 준비하는 늦여름 숲에’펼쳐 놓은 지난 시간의 뒤를 돌아보는 일, 그것이 서둘러야 할 일로 다가온 화자를 읽는다.

‘처음 만’난다는 ‘문장 속 당신의 손은’ 시적 영감이라면 좋겠는데…. 오십 줄에 서있는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언급하기엔 왠지 외면하고픈 ‘손’이라는 생각으로 섣부르게 쓸쓸하다. 사과나무가 있는 ‘나무평상에’ 앉아 ‘풀잎 점을’을 치며 그는 풀잎 같은 희망이라도 꿈꾸었던 것일까, 한 폭 수채화가 그려지는 저무는 저녁 풍경이다.

‘이른 저녁’ 그리고 ‘늦여름’, 모든 이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겐 ‘이른’시간이고 ‘늦은’ 계절로 다가오는 그 간극이 하늘과 땅 차이일 때가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일이란 ‘흐림과 명랑’이었던 화자의 일기처럼 고통스러운 날이 있고 즐겁고 행복한 날이 있어 서로 평행을 이루는 것일 지 모른다. 그렇지만 ‘죽기 좋았던 어제’보다 ‘살고 싶어지는 오늘’을 먼저 앞세우게 되는 오늘이라는 가치가 본연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장소의 탄생’을 읽어내기 위해 시의 행간들을 따라 걷다 어느 골짜기 끝 사과나무가 있는 그리고 나무평상이 보이는 집 앞에 멈추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했던’ 소중한 삶이 사이좋게 걸쳐진 ‘나무우체통’이 서있는 집을 만나게 된다.

시인이 살았던 시인의 집이 탄생한 것인가, 지금 이 시간, 어떤 이에겐 절절하게 귀하고 귀한 시간인데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은 어떻게 쓰이는지 돌아보며 하늘로 떠난 한 시인을 애도한다. 김곳 시인



*김길녀 시인은 1990년 등단해 부산 시단에서 오랜 세월 활발히 활동하며 좋은 시를 썼다. 이후 인도네시아와 서울 등지에서 살며 시와 산문을 계속 썼다. 김 시인은 2021년 5월 향년 57세로 별세했다. -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