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섬 어촌 마을 모알보알은 정어리 떼가 머무는 곳으로 유명하다. 정어리가 얼마나 많은지 바다를 까맣게 덮어 버릴 정도다. 해류를 따라 전 세계 바다를 떠도는 정어리 떼가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2010년 봄부터였다. 그해 봄 정어리를 찾아 필리핀으로 향했다. 계절상 우기가 끝나고 건기로 접어드는 시점이어서인지 당시 날씨는 상당히 변덕스러워 장대 같은 빗줄기에 거센 바람까지 몰아치고 있었다. 운항 가능한 방카(필리핀 전통 선박)를 겨우 수배해 스쿠버 장비와 수중촬영장비를 실었다. 2ｍ가 넘는 파도가 뱃전을 때려대고 배는 파도에 떠밀리며 ‘갈지자(之)’ 항해를 시작했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바다는 경외감을 느끼게 해준다. 잔잔한 물결이 포근하게 감싸다가도 어느 순간 성난 파도로 돌변해 다그친다. 바다의 외침이 강할수록 단련되어야 하는데 나는 늘 그 자리이다. 어느 때부터였을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치면 바다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 그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두려움은 공황 상태를 불러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뿐이다.

악전고투 끝에 정어리 떼가 머무는 곳에 도착했다. 배를 몰고 온 어민이 바닷속을 가리켰다. 망설임 없이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정어리 무리를 찾을 수 없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파도가 정어리 떼를 깊은 바다로 밀어 넣어 버렸을까. 아쉬움을 뒤로한 채 첫째 날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둘째 날, 어제보다 더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바다로 향하는데 키를 잡은 필리핀 어부의 표정에 비장함 마저 묻어났다. 그도 바다에 모든 것을 맡겼을까? 30여 분의 항해 끝에 필리핀 어부는 무슨 확신이라도 한 듯 배를 멈췄다. 파도가 심할 때 배를 멈추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1시간 후 만날 것을 약속하고 장비를 챙겨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깥세상은 폭풍우로 생채기투성이였지만 바닷속은 너무나 고요했다. 바람은 기껏 바다 표면을 일렁이게 할 뿐 바닷속까지 헤집어 놓지는 못하고, 아무리 거센 빗줄기라도 바다를 젖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바닷속에서 주변을 살피는데 거대한 그림자가 느껴졌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수만 아니 수십만 마리의 정어리가 하나로 뭉친 채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을 가려버린 엄청난 수의 정어리, 정어리, 정어리들…. 휘어 감기며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무리는 어느 순간 갈라지나 싶더니 다시 뭉쳐져 행군 대열로 나서는데, 그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지켜보다 나도 모르게 무리 속으로 향하고 말았다. 하지만 정어리는 이방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석의 같은 극이 서로를 밀어내듯 정어리는 필자의 몸짓에 따라 물러섰다 다가오기를 반복했다. 한동안의 밀고 당김은 그들과 동화될 수 없는 필자를 외롭게 만들었다. 한 발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거리를 두고 본 정어리의 군무는 기기묘묘했다. 뭉쳤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 다시 뭉쳐 드는 형상은 아름답다 못해 장엄하고 장엄하다 못해 신비로웠다. 정신없이 정어리를 따라다니며 순간순간 변하는 그들의 움직임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오며 나를 받아들여 준 바다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셋째 날, 다시 정어리를 찾아 바다로 나섰다. 낮게 깔린 먹장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빛을 품은 바다는 더없이 아름답다. 오랜만에 보는 햇살에 왠지 기분이 들떴다. 정어리 떼와 만났던 장소가 가까워지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정어리들은 그대로 있을까…. 배에서 뛰어내릴 때 해수면에 부닥치는 충격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정신을 잃게 만든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수없이 많은 정어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바로 정어리 떼 한가운데로 뛰어든 것이다. 일단 정어리 떼에서 한 발 벗어나기로 했다. 그들과 떨어져 어느 정도 거리를 두자 안정을 찾은 정어리들이 다시금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전날과 달리 전체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정어리 떼 주변을 돌면서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는데 멀리서 바다거북 한 마리가 정어리를 노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리를 이룬 정어리 떼는 수많은 눈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여서 어느 방향에서 포식자가 접근하든 어느 한 마리에는 들키고 만다. 바다거북을 가장 먼저 발견한 한 마리가 몸을 숨기기 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무리 가운데로 파고들면, 주위에 있는 정어리들이 연쇄적으로 몸을 숨기면서 무리 전체는 더욱 조밀하게 뭉쳐져 피시 볼(Fish ball)을 형성한다. 수만 아니 수십만 마리의 정어리들이 동시에 지느러미를 강하게 퍼덕이는 바람에 귓가에는 ‘윙~’하는 진동음이 강한 파장으로 남았다. 결국, 정어리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덩어리에 위압감을 느낀 바다거북은 정어리 사냥을 포기한 채 쫓기듯 멀어져 가고 일상으로 돌아온 정어리들은 다시 대열을 정비하며 그들만의 몸짓을 되풀이했다. 정어리 떼를 쫓는 바다거북. 그리고 위기를 탈출하는 정어리들의 몸짓. 나는 이 과정을 지켜보며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스쿠버 다이버이기에 이들과 함께할 수 있고, 수중 사진기로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보고 느낀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이 얼마나 나에게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지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 바다와 함께 했었고 앞으로 많은 시간 바다에 머물 것이다. 그 과정이 늘 순탄할 수만은 없겠지만 정어리 떼와 함께하며 느꼈던 행복을 기억하는 한 나는 바다로의 여행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정어리

정어리는 바다 생태계에서 중요한 어류로 ‘바다의 쌀’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정어리가 플랑크톤을 먹고 성장한 후 고등어와 명태, 가다랑어, 방어, 상어 등 육식성 어류뿐 아니라 물개와 고래 같은 포유류나 바다거북 같은 파충류의 먹잇감이 되기 때문이다. 정어리 떼에 대한 기록은 자주 등장한다. 우리나라만 해도 1923년에 함경도 해안으로 엄청난 수의 정어리 떼가 몰려왔었다. 얼마나 양이 많았던지 바닷가에 밀려온 정어리를 주워 모은 것만 집집마다 몇 가마씩 되어 이를 절여두기 위한 소금이 품귀 현상을 빚었고, 300t급 기선이 정어리 떼에 막혀 항해를 못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1939년에만 120만 t의 어획고를 올려 단일 어종으로는 세계적인 기록을 세우는 등 절정기를 맞았다. 과거 정어리 기름은 선박용 연료로도 사용되었는데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면서 우리 연안에 대규모로 몰려드는 정어리 떼에 고무되었다가 1939년을 정점으로 회유량이 줄어들자 연료난으로 타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정어리 사냥에 나선 바다거북을 피해 정어리들이 뭉치고 있다. 정어리 같은 작은 어류는 포식자를 피해 무리를 이루는 것은 가장자리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안쪽으로 파고들려는 집단 이기심 때문이다.

	다이버의 출현에 뭉쳐 드는 정어리들의 모양이 마치 나비의 날개를 닮았다.

	2018년 필리핀 모알보알에서 만난 프리다이버가 정어리 떼와 어우러져 있다. 필자는 2010년 모알보알을 찾은 이래 지금까지 30회 이상 이곳을 방문했다.

	수만 아니 수십만 마리의 정어리들이 수면을 덮으면서 이동하면 물속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만들어진다.

	정어리 무리 가운데 전갱이 떼가 보인다. 전갱이 입장에선 먹잇감이 한곳에 모여 있으니 손쉽게 사냥을 즐길 수 있다.

	수만 마리의 정어리가 동시에 지느러미를 움직이면 물속에는 소리가 진동이 되어 몸에 전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