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켄 로치는 영국뿐 아니라 동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감독이다. 그는 평생 노동자의 삶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면밀하게 관찰했으며, 노동자의 곁에서 친구로 살아왔다. 그의 신작 '지미스 홀'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으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1932년을 배경으로 한다.

독립전쟁과 이념의 차이에 따른 내전으로 형제와 이웃이 적이 되어 서로를 죽이던 끔찍한 살육전이 계급투쟁으로 옮아간 시절, 지미 그랄튼은 공황기를 겪고 있는 미국 생활을 접고 아일랜드의 고향으로 돌아온다. 늙은 어머니와 오랜 친구들이 그를 반기고, 또 그의 이름을 전설로만 알고 있던 젊은이들도 환대한다. 그런데 보수적인 가톨릭교회와 지주들이 결탁한 세력은 새로운 파시스트가 되어 소작농을 비롯한 지미의 친구들을 '빨갱이'라고 부르면서 감시하고 탄압한다.

마을 코뮌의 중심 역할을 했던 마을회관을 재건하면서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한다. 이들은 '단지 자유롭게 춤을 추고 싶고' 아일랜드어를 새로 배우며 노래와 시를 낭송하고 그림을 그리길 원한다. 하지만 지배계급이 이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마을을 지켜가는 '독학자들'의 위대함과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 때문이다.

켄 로치는 투쟁의 과정을 정치 토론과 단체행동으로 국한하지 않고 오히려 재즈와 춤, 예이츠의 시 낭독과 복싱 등 심신을 단련하는 도구를 더 많이 보여줌으로써 이들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땅에 발을 딛고 비상하듯 춤을 추는 마을회관의 무도회 장면과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을 읊어대는 교회 장면이 교차하는 것은 이 영화의 시각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한편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와 인간다움의 회복이 이루어질 때,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을 미행하고 조사하고 호명한다. 환하게 웃으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연대감의 현장과 오랜 시간 민족과 국가를 황폐화한 증오와 반목을 공고히 하려는 조직의 모습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립과 증오, 그로 인한 회복 불가능한 아픔을 떠오르게 한다.

켄 로치가 노동계급의 코뮌을 지지하는 방식은 이들의 소박하고 솔직한 삶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시선에서 비롯된다. 그는 같은 마음을 품은 이들의 굳은 신념과 행동의 일치가 불러일으키는 당당함과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품위를 끝까지 지키려는 숭고한 역사적 순간을 지켜봄으로써 아픔으로 점철된 역사 안으로 관객을 불러들인다.

비록 지미 그랄튼이 아일랜드 역사상 유일하게 불법 이민자로 추방당하고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면서도 돌아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켄 로치는 끌려가는 지미를 배웅하는 젊은이들의 자전거 행렬과 그들의 마지막 인사와 환한 미소를 통해 코뮌을 향한 모두의 약속을 상기시킨다.

평생 불평등과 억압 구조와 맞서 싸운 급진적 사회주의자인 켄 로치 감독도 이제 여든을 앞두고 있다. 80년 전에 일어난 아일랜드의 비극, 지미 그랄튼과 친구들이 겪은 실패가 인류를 향한 위대한 약속과 연대의 현장으로 이어진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따뜻하고 지혜롭지만 단호한 태도로 노동자를 품어온 노감독의 새로운 전망이 연대감의 약속이라는 사실이 감사하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