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동대학살 알린 아나키스트 역
- 젊은 독립투사로 강렬한 변신
- 동지 후미코 역의 최희서와 호흡

- "실존한 역사적 인물 연기에 긴장
- 이준익 감독에 대한 기대로 선택
- 당시 신문 사진 참고해 박열 재현
- 일본어 일일이 한글로 적고 외워"

2014년 전역 이후 드라마 '비밀의 문' '시그널' '내일 그대와', 영화 '탐정 홍길동:사라진 마을' 등에 출연하며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고 있는 이제훈이 이번에는 '동주'의 이준익 감독과 손잡고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의 삶을 재조명했다.

	영화 '박열'에서 이제훈은 조선인 관동대학살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일본 정부에 맞섰던 박열을 연기했다.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제공

지난달 28일 개봉해 5일 만에 관객 100만 명을 넘기며 호응을 얻은 '박열'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 6000여 명을 학살하며 위기에 빠진 정부를 구하려 했던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실화를 그린 영화다.

이제훈은 역사 속에 가려져 있었던, 그래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박열을 연기했다. 그는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뜨거운 삶을 살았던 한 젊은 투사의 모습으로 변신해 강력한 울림을 준다.

"박열을 연기하면서 '나는 과연 세상의 부조리함에 정면으로 맞서 바꾸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나'라는 질문을 하며 반성했다"는 이제훈.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더욱 당당하고 솔직해진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박열'의 어떤 점이 끌렸나?

▶지난해 '내일 그대와'를 마치고 11월 중순쯤 이준익 감독님께서 '박열' 시나리오를 주셨다. 무엇보다 같이 작업하고 싶었던 이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준 것에 흥분했다. 반가운 나머지 다른 시나리오는 제쳐두고 탐독했다. '박열'이라는 캐릭터가 주는 강렬함이 와 닿았지만 실존했던 독립투사를 연기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 감독님이라면 저를 다 던져 연기할 수 있게 해주지 않겠냐는 기대를 갖고 선택했다.

-'박열'의 시작은 이 감독이 제작했던 영화 '아나키스트'(2000) 때로 올라간다. '아나키스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료를 조사하며 박열을 알게 된 것인데, 박열 또한 아나키스트이다.

▶중절모와 양복을 입은 멋진 혁명가의 모습이 등장했던 '아나키스트'를 볼 때는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해 '동주'를 보면서 이전에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와 다른 내면적인 배움이 있었다. 윤동주 시인을 보러 갔는데 송몽규를 알게 되기도 했다. 이번 '박열'이라는 작품은 '동주'의 흐름과 같은 궤를 하지만 영화의 결은 다르다.

-박열의 어떤 면을 표현하고 싶었나?

	영화 '박열'의 한 장면.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제공

▶처음에는 그의 용맹함과 비장함, 억압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부족한 생각이었다. 그보다는 영화의 중반부터 시작되는 긴 공판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했다. 관객분들이 그 부분을 봐 주셨으면 좋겠다.

-얼굴을 클로즈업한 '박열' 포스터를 보면 이제훈 씨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화제였다.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등은 어떻게 설정했나?

▶영화를 크랭크업하고 포스터 촬영을 했는데, 이렇게 뜨거운 반응을 얻을지 예상 못 했다. 포스터의 모습으로 영화도 촬영했는데 감옥 안, 재판받는 과정 등의 모습도 당시 신문의 사진 등을 참고해서 똑같이 입었다. 초반에는 촬영장에서 저를 못 알아보는 스태프들도 많았다. 이 감독조차 저를 보고 "너구나" 하면서 당황스러워했다. 그때 '이제훈'이라는 사람을 지우고 온전히 '박열'로 연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외모뿐만 아니라 일본어 대사가 굉장히 많았는데, 감정이 잘 살았다.

▶일본어는 '곰방와' '아리가토' 밖에 못하는데, 일상적인 대사뿐만 아니라 검사에게 심문을 당할 때나 공판장에서 긴 대사를 해야해 큰 고민이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감정을 실어서 해야 하니까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히라가나를 못 읽기 때문에 한글로 적어서 외웠는데, 마치 외계어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열'에 출연한 가네코 후미코 역의 최희서 씨와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 역의 김인우 씨께 대사 가이드 녹음을 부탁해 그것을 계속 들었다. 촬영장에서 일본어 대사를 계속 읊조리고 다녀 한 스태프가 '노이로제 걸리겠다. 그만하라'고 하기도 했다. 그렇게 채워나가지 못했으면 지금만큼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인이 봐도 이질감이 없이 메시지가 잘 전달됐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동주'에서 일본인 쿠미 역을 맡았던 최희서 씨가 '박열'에서 박열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 역을 맡았다. 최희서 씨와의 호흡은 어땠나?

▶7년 전 독립영화 '마크의 페스티벌'에 출연한 최희서 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생활 연기나 영어 연기가 자연스러워서 언젠가 두각을 나타내겠다 싶었는데 '동주'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후미코 역을 맡았다고 했을 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장편영화 주연은 처음이지만 후미코가 보여줘야 하는 기개나 담대한 성격이 잘 묻어나겠다 싶었다. 그리고 후미코를 최희서 씨만큼 해낼 수 있는 배우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촬영을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들었다. 어떤 마음이 들었나?

▶'박열'은 24회차 만에 촬영을 마쳐 단기간 고강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매 순간 긴장됐고, 후회하지 않을 연기를 보여줘야 해서 부담감과 압박감이 심했다. 그래서 나름 스스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촬영에서 땀을 흘리는 스태프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아닌 이분들이 저를 만들어줬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많이 났다. '박열'은 짧았지만 저에게는 길게 여운이 오래갈 작품이다. 앞으로 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칠 것 같다.

이원 기자 latehop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