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갈한 약선 한정식 코스요리
- 겨우살이 끓인 물로 모두 조리
- 화학조미료 일절 사용 안 해

- 두유같이 부드러운 들깨탕
- 과자처럼 와삭 구운 눈볼대
- 사과와 어우러진 돼지고기 수육
- 황제 해물 계란찜 등이 대표선수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챌 수 있는 건 해가 지는 시간이다. 어느새 오후 7시만 되도 어둑해지면서 ‘어, 해가 이렇게 짧아졌나’ 싶다. 그만큼 지루했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는 증거다. 여름 내내 더위에 지쳐 조금 자극적인 음식들로 버텨왔으니 이제 입에 즐거우면서 몸에도 좋은 음식으로 몸을 보할 때다. 다양한 음식 중에서도 한국 사람 몸에 제일 부담이 덜한 건 한식이다. 약선요리를 정갈하게 내는 곳을 찾아 몸과 마음 모두를 건강하게 다독여 봤다.

	다양한 요리를 코스로 맛볼 수 있어 눈과 입 모두 즐겁다.

부산 동래구 사직동 수선재(051-504-7733)는 약선요리를 내면서 우선 모든 요리에 들어가는 물부터 달리했다. 겨우살이를 끓여낸 물을 사용하는데 자리에 앉으면 겨우살이 차부터 내준다. 겨우살이 차는 부드러운 맛으로 한약이나 이파리 냄새가 나지 않아 물처럼 마시는 데도 별로 거리낌이 없다. 여기에 화학조미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중국 약선을 응용한 황제 해물 계란찜. 아래쪽에 푸딩같이 계란찜이 있어 국자로 떠서 위의 해물과 같이 먹는다.

수선재는 코스 요리로 내는데 이날 맛본 것 중 허진 대표가 ‘수선재 대표선수’라고 소개한 음식들이 역시 기억에 남았다. 특히 들깨탕은 들깨 껍질이 전혀 없이 아주 매끄럽고 고소한 맛만 감돌았다. 맛 담당 기자로서 고백하자면 기자는 들깨를 좋아하지 않는다. 들깨 특유의 향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데다 음식에 들깻가루를 넣으면 오직 들깨 맛밖에 나지 않는 강한 재료라서다. 더군다나 들깨로 끓인 죽이나 탕 종류라면 더욱 질색이다. 혀 위에 껍질이 남는 것이 싫고 약간 아리면서 쓴 듯한 들깨의 뒷맛이 싫어서다. 하지만 수선재의 들깨탕에선 입속에 남는 알갱이의 불쾌감이나 잡맛도 전혀 없었다.

수선재는 그날그날 쓸 만큼의 들깨만 물과 함께 갈아 체에 거른다. 그러면 고소한 깨 국물만 아래에 남고 위에는 껍질이 소복이 남는다. 보통의 식당에선 이렇게 하지 않는다. 갈아낸 깻묵에 물을 타면 얼마든지 양을 늘려서 끓일 수도 있고 그게 위생상이나 맛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깨소스를 곁들여 사과와 함께 먹는 돼지고기 수육. 고소하고 부드러우면서 뒷맛은 상큼한 사과가 잡아준다.

허 대표는 “이렇게 해서 끓여내면 마치 두유 같은 부드러움만 즐길 수 있다. 요리하는 사람이 고생하고 한 번이라도 손이 더 가면 드시는 분들이 즐거운 게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허 대표는 들깨와 커피는 산화가 무척 빨라서 알갱이 상태로 보관하다가 먹을 때마다 갈아서 먹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기자가 싫어하는 쓰면서 아린 듯한 맛은 들깨가 산화하면서 내는 잡맛이었던 거다.

눈볼대구이도 참 잘 구웠다. 생선구이는 어디서든 먹을 수 있는 평범한 음식이다. 하지만 수선재는 그런 음식일수록 정성 들여 조리한다. 눈볼대는 머리가 무척 큰 생선인데 담백해서 밥반찬으로 많이 먹는다. 이걸 아주 바삭하게 잘 구워내서 아가미와 볼 부분까지 과자처럼 와사삭 씹어먹을 수 있게 했다.

	갈아서 체에 내려 두유 같은 식감의 들깨탕, 채소 탕수 등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음식이 주를 이룬다.

함께 나온 황제 해물 계란찜은 막걸리 안주로 딱 맞다. 위에서 그냥 봤을 때는 큼직한 해물과 채소가 들어간 탕처럼 보인다. 작은 국자로 그릇 아래까지 푹 넣어 떠내니 아래에 푸딩처럼 부드러운 계란찜이 있다. 이 계란찜 위에 해물과 채소들이 올라가 있는 셈이다. 신선한 해물과 계란이 어우러지는데 달지 않고 담백한 송명섭 막걸리가 더해지니 미소가 지어진다. 다른 음식들은 간이 세지 않지만 달걀찜은 조금 간을 더하니 입에 착 붙었다.

빼놓을 수 없는 요리가 돼지고기 수육이다. 돼지고기 갈비뼈에 붙은 부위로 지방과 살이 잘 어우러지는 부위로만 삶아냈다. 여기에 깨 소스와 얇게 썰어낸 사과를 끼웠다. 사과와 돼지고기 수육을 함께 먹어본 적이 없어 왜 이렇게 했을까 궁금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수육에 사과가 아삭하면서 상큼함을 더하니 이렇게 담아낸 이유가 설명됐다.

	보통의 밀전병 대신 무쌈을 활용한 구절판. 상큼해 식사전 입맛을 돋우는 요리다.

허 대표는 “수육은 하루 전에 예약하셔야 맛볼 수 있다. 부부가 다 조리를 하다 보니 시간이 좀 필요한 요리들은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부탁했다.

한정식 코스는 밥으로 마무리된다. 이미 배가 가득 찼지만 마지막 밥 한술에 짭조름한 된장으로 입을 씻어야 한식은 끝이 난다. 밥에는 다시마를 밥알보다도 작은 크기로 썰어 넣어 윤기와 감칠맛을 더했고 된장은 깔끔했다. 거기에 더덕 백김치와 잣을 고추장에 묻힌 잣 장아찌까지 더해지니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기분이었다. 한정식을 먹으면 배는 부른데 뭘 먹었나 모르겠다는 분들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다.

글·사진=최영지 기자 jador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