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중종 때 지은 무진정
- 고려시대 석불 석조삼존상
- 신라가 축조한 성산산성
- 아라가야 말이산 고분군 등
- 역사 되짚어가는 재미에
- 늦가을 풍광 더해져 운치

요즘은 농담처럼 음료수 한 병 사러 가도 차를 몰고 간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사람의 몸이 자동차를 타는 데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그렇지만 빠른 속도와 편리함이 주지 못하는 것도 많다. 느리게 움직일 때만 눈에 들어오는 게 있고 걸어 다녀야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휙 몰아친 바람에 떨어진 낙엽이 얼굴을 치고 가는 건 딱 이맘때 걸어 다니면서 겪는 일 가운데 하나다.

함안역에서 도로를 따라 걸어와 괴항마을에 들어서면 연못 너머 무진정이 바라다보인다. 왼쪽 건물은 재실인 괴산재이며 오른쪽 언덕 위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것이 무진정이다.

경전선 기차를 타고 함안을 찾아봤다.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는 열차 시간을 맞춰야 하고 이동 거리도 만만찮지만 걷는 데 자신 있는 이라면 기꺼이 나설 만한 곳이다. 함안역을 출발해 북쪽으로 함안면과 가야읍에 걸친 명소들을 이어간다. 조선시대 정자에서 시작해 고려, 신라·아라가야로 되짚어가는 여정이다. 오는 주말이면 남아 있던 잎들이 거의 떨어지고 마른 가지만 보일지 모르지만 낙엽이 바람결에 뒹굴면 그대로 운치 있는 곳이다.

■낙엽 날리는 무진정

느티나무 노거수 그늘에 있는 대산리 석조삼존상.

함안역을 나서 북쪽으로 도로를 따라 뚜벅뚜벅 걸어간다. 함안면 괴산리 괴항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노거수에서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제법 큰 연못과 언덕 위 정자 무진정이 보인다. 연못을 반쯤 덮은 물풀 위에 한 겹 더 낙엽이 덮고 있다. 정면의 재실인 괴산재를 통해 곧바로 무진정으로 오를 수 있고 연못을 빙 돌아 다리를 건너 정면으로 올라가도 좋다.

무진정은 조선 중기 중종 때 문신인 무진 조삼이 지은 정자다. 연못에서 작은 인공섬을 거쳐 정면으로 정자에 오르면 주세붕의 글씨로 여겨지는 ‘무진정’ 편액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칸 마루방에서 보이는 정면은 나무가 가린다. 키 큰 나무들이 없다면 소담한 연못과 인공섬, 그 너머 함안천과 검암산 자락의 절벽이 한눈에 들어와 멀고 가까운 경치가 어우러진 기막힌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상상에 그친다. 정자 정면의 문에 바른 창호지도 여러 갈래 찢어져 제대로 관리되는 느낌을 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번잡스럽지 않은 정자 마루에 앉아 있다 보면 어느새 시곗바늘이 한참 돌아가 있다.

■무심하게 선 대산리 석불

무진정을 나서 오른쪽의 건널목을 건넌 뒤 이어 대사교를 건너가면 ‘대사마을’ ‘대산리 석불 170ｍ’ 안내석이 보인다. 곶감이 주렁주렁 내걸린 농가를 지나 주택과 밭 사이 느티나무 노거수 그늘에 있는 대산리 석조삼존상을 만난다. 고려시대 만들어진 등신대에 가까운 이 석불은 보물 제71호로 지정돼 있다. 보물이지만 개방돼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석불 보호를 위해 세운 누각 근처에는 차량도 주차돼 있어 보물이라는 무게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깔끔하게 주변이 유지되는 것이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쉴 새 없이 잎을 떨구는 느티나무와 무채색의 석불 너머 동네 뒷산의 울긋불긋한 단풍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멀리 함안면과 가야읍을 잇는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틈틈이 들리기는 하지만 가만히 석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적막감에 둘러싸인다.

■1.4㎞ 한 바퀴 성산산성

성산산성(위)와 말이산 고분군. 두 곳 모두 노거수가 주변 풍광과 잘 어우러진다.

성산산성으로 가려면 다시 무진정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차장 안쪽 화장실 옆으로 산성 올라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무진정과 대산리 석불은 함안면 땅이지만 무진정 주차장을 경계로 성산산성과 고분군은 가야읍이다. 돌로 포장된 길을 600ｍ 올라가면 사발처럼 동그랗게 들어앉은 산성에 닿는다. 부직포로 덮은 성벽 입구에 안내판이 있다. 여기서부터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도는 길은 완만하게 오르내린다. 아라가야 멸망 후 신라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산성은 높이 140ｍ인 조남산 정상부에 1.4㎞ 길이로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이다.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길은 석축 위로는 올라가기 어려워 바깥을 내다볼 수는 없지만 억새밭에 이어 잘생긴 나무들이 성벽을 빙 돌아가며 계속 나타나 심심하지 않다. 절반가량 돌면 성벽 너머 말이산에 봉긋하게 솟은 고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산성을 오르내리는 길은 무진정 주차장에서 가는 외길이라 한 바퀴를 돈 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한다.

■말이산 고분군과 함안박물관

무진정에서 말이산 고분군까지 가는 길은 제법 멀다. 가야읍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가다 백산마을을 거쳐 도동마을 방향으로 가면 고분군 안내판이 있다. 도로를 경계로 남쪽에는 32~37호분이 있고 북쪽의 말이산 구릉을 따라 1~31호분이 있다. 능선의 서북쪽 자락에는 함안박물관이 있다.

가야읍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고분군은 아라가야의 유적이다. 가야라면 경북 고령이나 경남 김해를 떠올리지만 올해 사적으로 지정된 부산의 연산동 고분군과 함께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말이산 고분군은 규모로 봐서 가야 문화를 대표할 만하다. 말이산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도동마을로 가는 도로에서 시작하면 능선을 따라 31호분에서 1호분까지 되짚어간다. 완만한 길을 오르내리며 차츰 함안박물관으로 다가간다. 4호분 앞에서 왼쪽 함안박물관을 들렀다가 다시 올라와 오른쪽 함안군청으로 내려가면 고분과 거목이 어우러진 풍광을 고루 감상할 수 있다.


# 주변 가볼 만한 곳

- 뜨끈한 소고기국밥에 신라시대 석탑 구경까지

대구식당의 소고기국수·돼지불고기(위)와 함성중학교 교정에 있는 주리사지 사자석탑. 탑신을 떠받치는 네 마리 사자가 인상적이다.

함안역을 경계로 남쪽에는 함안면 소재지가 있다. 함읍우체국 앞 공영주차장을 둘러싸고 소고기국밥집이 들어서 있는데 이곳이 한우국밥촌이다. 대구식당을 비롯해 여러 집이 있다. 찬바람이 불 때는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이 제격이다. 소고기국밥·면을 넣은 소고기국수, 밥과 면을 반씩 넣은 짬뽕 모두 7000원이다. 돼지불고기(1만5000원)도 함께 먹을만하다.

식후경으로 둘러볼 만한 곳이 있다. 국밥촌 입구에서 함안파출소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함성중학교가 나온다. 학교 쪽으로 들어가면 운동장에 들어서기 전 왼쪽에 함안 주리사지 사자석탑이 서 있다. 여항산 자락 주리사 터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탑신을 떠받치는 네 마리 사자가 인상적이다. 함성중 바로 옆 함안초등학교 한쪽에는 함안민속박물관이 있다. 떡살, 호롱불, 근대 생활·농경 유물이 전시된 이곳은 평일 오전 9시~오후 5시, 토요일 오전 9시~오후 1시 문을 열며 일요일과 공휴일은 휴관이다.


# 교통편

- 부전역→ 함안역 경전선 이용하면 하루에 왕복 가능

함안으로 가는 경전선 열차는 부전역에서 출발한다. 오전 6시18분, 10시35분, 오후 1시50분, 6시44분 네 차례 있다. 돌아오는 열차는 함안에서 오후 2시19분, 6시43분 출발한다. 부전역에서 오전 10시35분 열차를 타고 가서 함안에서 오후 6시43분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돌아오면 적당하다.

함안박물관이나 함안군청에서 함안역으로 돌아오는 게 번거롭다면 함안터미널에서 버스편을 이용해도 된다. 함안에서 부산 서부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7시30분까지 2시간 간격으로 있다.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면 마산(하루 25회 운행, 막차 밤 10시)으로 가서 부산행 버스를 타면 된다.

글·사진=이진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