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화운동 참여 대학생 역
- 6·10 민주항쟁 이후 태어나
- 처음엔 감정이입 쉽지 않아
- 공부하며 시대 분위기 익혀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에서 매혹적인 하녀 숙희 역으로 그해 각종 신인배우상을 휩쓸며 일약 충무로의 신데렐라로 떠오른 김태리가 1년 반 만에 ‘1987’로 돌아왔다.

	영화 ‘1987’에서 대학 입학 후 동료 학생들의 시위를 보며 갈등하는 연희 역을 맡은 김태리. 이용우 기자

지난해 12월 27일 개봉 이후 8일 만에 300만 관객을 모은 ‘1987’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시위 중 최루탄을 머리에 맞은 이한열 사건 등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의 과정을 그린 영화다. 김태리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거센 물결 속에서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6·10 민주항쟁의 맨 앞머리에 서게 되는 신입생 연희 역을 맡았다. 연희는 대학 선배 이한열(강동원)과의 만남과 양심적 교도관 삼촌(유해진)과의 관계 속에서 민주화의 한가운데로 들어서게 된다.

1990년생으로 6·10 민주항쟁을 경험하지 못했던 김태리는 1987년의 한국 사회를 어떻게 느꼈고,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한국영화의 대들보로 성장할 그녀를 최근에 만나 영화 ‘1987’과 앞으로 보여줄 연기 세계에 대해 물었다.

-김태리 씨는 6·10 민주항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다. ‘1987’ 시나리오를 보고 어떤 느낌이었나?

▶솔직히 연희에게 쉽게 감정 이입하긴 어려웠다. 그런데도 광화문 촛불집회 때 많이 보았던 플래카드가 ‘이게 나라냐’였는데 그 말에 공감이 되는 영화인 것 같다. 연희는 ‘나와 가족만 잘 살겠다고 귀 닫고 살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던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착한 교도관 삼촌을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고문실로 잡아끌고 가서 생사도 모르게 하는 ‘이게 나라냐’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내가 대체 어디에서 살고 있지?’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1987’은 시대 분위기를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1987년 당시의 시대상은 어떻게 알아나갔나?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다양한 영상과 책을 읽으면서 당시 분위기를 파악했다. 또한 영화에는 짧은 대사로 표현되지만 연희는 노동자의 딸이라는 전사(前史)가 중요했다. 그래서 캐릭터를 표현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회사 권력과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많이 찾아봤다.

-‘1987’을 연출한 장준환 감독은 연희 캐릭터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했는가?

▶장 감독님께서 제 생각보다 연희를 중요한 캐릭터로 보더라. 사건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인물이고, 일반 시민의 마음을 대변하기 때문인 것 같다. 사건을 보면서 분노하고 있지만 삶에 바빠서, 혹은 어떤 피해를 당할까봐 목소리 내지 못하는 사람 말이다.

-30년 전과 촛불집회로 대통령을 탄핵한 2017년을 비교하면 어떤가?

	6·10 민주항쟁의 과정을 그린 영화 ‘1987’.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국민들이 힘을 합쳐서 기득권의 권력 구조를 바꾸는데 힘쓴 것이 닮았다. 반면 부패 권력이 은폐하고,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피해가 된 것도 많이 닮은 것 같다.

-연희가 이한열과 처음 만나는 장소는 소개팅하러 나갔던 서울 중구 명동이다. 그때 시위가 일어나며 이한열과 함께 백골단을 피해 달아난다.

▶명동은 자주 지나다니던 곳인데,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명동 시위 장면은 인천의 오픈 세트에서 촬영했지만 골목으로 도망 다니는 장면은 실제 명동 골목에서 촬영했다.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도 등장했던 그 골목이다.

-어느 신발 가게 창고로 도망친 후 이한열이 복면을 내리면서 강동원 씨의 얼굴이 처음 드러난다. 영화 ‘늑대의 유혹’의 우산 장면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저는 아직 ‘늑대의 유혹’을 못 봤다. 그런데 그 장면을 촬영할 때는 관객분들처럼 강 선배님의 꽃미남 얼굴에 신경 쓰진 못했다. 강 선배님이 “세수하세요”라고 하는 대사의 호흡이 너무 웃겼기 때문이다. ‘1987’은 강 선배님뿐만 아니라 유해진, 설경구 선배님 등 좋은 분들과 촬영해서 좋았다.

-연희는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고 라디오를 좋아한다. 특히 고(故) 유재하의 노래를 듣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들리는 ‘가리워진 길’을 강동원 씨와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극단 생활을 할 때 옛날 노래를 좋아해서 많이 알게 됐고, ‘가리워진 길’도 그때 알았다.

-대학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했는데, 극단생활을 3년간 했다. 연기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수능을 보고 ‘나는 발음이 좋으니까 성우나 아나운서를 해보자’며 신방과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 수업을 들으니 생각과 달리 재미가 없더라. 대학 생활을 즐기고 싶어서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신입 부원 중 잘한다는 말을 들으니 흥미가 더 생겨서 연기하게 됐다. 돌아보면 제가 잘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못하는 것이었다.

-2016년 ‘아가씨’로 충무로의 신데렐라가 됐다. 이후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

▶바깥출입이 조심스러워진 대신 작품 선택의 폭이 많이 넓어졌다. 감독님들과 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2017년은 ‘1987’과 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를 촬영했다. 2018년에는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이병헌 씨와 호흡을 맞춘다. 배우로서 비중이 커지고 있는 것 같다.

▶2017년은 생각도 많았고, 일들도 많았다. 2018년은 20대의 마지막 해다. 좋은 배우가 되고 싶고, 연기를 즐겁게 해서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