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은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역
- 파편적 기억뿐인 외환위기
- 굴욕 협상하며 국민보호 뒷전
- 당시 실상 알리려 출연 결심
- 어려운 경제용어 외운다고 고생
- 뱅상 카셀도 한국 공부하고 와

절체절명의 경제 위기에 놓인 국가를 구하기 위해 김혜수가 나섰다. 실제 1997년 벌어진 IMF사태(환란)를 배경으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개봉 28일)에서 국가부도의 위기를 가장 먼저 예견하고 대책을 세운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김혜수.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강영호 작가 제공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국가부도 1주일을 앞두고 위기를 막으려는 정책 집단과 정부, 위기 속에서 돈에 베팅하는 사람 그리고 경제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중소기업 사장 등의 이야기를 다룬다. 김혜수는 전문성과 신념을 지키며 위기 상황을 국민에게 알리고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보수 관료사회의 벽에 막혀 좌절하는 한시현을 마치 실제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연기했다.

지금도 우리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21년 전 IMF사태. “시나리오를 읽은 후 출연 여부와 상관없이 영화화돼 많은 사람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김혜수를 만나 제목부터 문제적인 ‘국가부도의 날’에 대해 이야기했다.

-‘국가부도의 날’은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시나리오를 보고 어떤 느낌이었나.

▶처음에는 비스듬히 누워서 편안하게 보다가 몇 장 넘긴 뒤 자세를 고쳐 잡았고, 나중에 어려운 경제용어는 단어를 검색하면서 읽었다. 저도 IMF를 20대 후반에 겪어서 모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우리가 과소비해서 IMF 사태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몰랐던 것이 많았다. 우리 영화는 인물들은 가공됐을지언정 IMF와의 협상 내용은 가공되지 않았다.

-1997년 IMF사태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파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외환 위기를 체감하기 전까지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던 느낌이 있다가 뭔가 불균형이 감지됐다. 저는 당시에도 연기를 하고 있어서 직접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지만 실물경제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이고, 관료들과 대책을 세워야 하는 역할의 특성상 전문적인 경제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생소한 숫자와 경제 용어를 외우기가 쉽지 않았겠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경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도 어려운 용어일 것이다. 저에게는 너무 생경해서 외웠다고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덮으면 바로 잊혔다. 저뿐만 아니라 배우, 스태프에게 경제용어와 뜻풀이를 해놓은 페이퍼를 줬다. 그래도 잘 외워지지 않아서 경제 강의를 요청했는데, 자문해 주신 분들이 경제용어를 경제용어로 설명하니까 더 어렵더라. 그러다 금융권에 계신 한 분이 경제에 대한 기초상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설명을 해주셨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됐다.

-IMF 총재 역으로 출연한 뱅상 카셀과는 영어로 연기했다. 역시 경제용어를 영어로 해서 외우기 쉽지 않았겠다.

▶뱅상 카셀과 협상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중요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배우를 상대해서 긴장감과 부담감도 만만치 않았다. 영어 대사에서 오는 중압감이나 불편함이 있으면 한시현이 지닌 감정이나 진심을 제대로 실을 수 없기 때문에 5개월간 연습했다.

-뱅상 카셀은 프랑스 대표 배우인데, 특별출연처럼 등장해서 놀라웠다. 뱅상 카셀과의 연기 호흡은 어땠는가.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공부하고 왔더라. 특히 IMF 외환 위기를 극복한 한국에 대해 궁금했다고 하더라. 해외의 유명 배우가 그렇게까지 공부를 하고 왔는데, 한국 배우로서 진정성 있는 연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긴장감이 있었다. 제가 시력이 좋지 않은데 촬영장에서 연기할 때 뱅상 카셀과 거리가 있어서 얼굴의 디테일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모니터를 하면서 표정을 봤는데, 총재 역을 그렇게까지 훌륭하게 해줄지 몰랐다.

-영화를 보면 IMF사태 당시 정부가 위기 상황을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과 IMF와의 굴욕적인 협상 과정이 분노를 일으킨다.

▶협상 과정을 왜 공개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굴욕적이었는지 국민은 모르지 않았는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 약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IMF행을 선택한다고 해도 최소한 나라와 국민을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한데 다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그 부분에서 피눈물이 나는 느낌을 받았다. IMF가 평화적으로 우리나라를 구제해줬다고 아는 분들이 많다. 과연 우리가 아는 것은 어디까지이고, 언론의 역할은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영화는 경제 정책의 중심에 있던 한시현, 경제 위기 속에서 증권 회사를 관두고 투자자를 모아 역 베팅을 하는 윤정학(유아인), 작은 그릇 공장을 경영하며 경제 위기를 온몸으로 맞는 갑수(허준호)가 교차로 등장한다. 그런데 젊은 세대는 위기에 베팅하는 윤정학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을까 싶다.

▶젊은 세대가 아니어도 한시현을 응원하지만 윤정학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을 한편에 가질 것이다. ‘나도 그런 상황에서 돈을 벌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감정인 것 같다. 유명 유튜버나 건물주가 요즘 아이들의 목표라는데, 이런 세태는 우리 기성세대가 아이들 욕망을 부추긴 결과다. 우리 영화가 답을 주진 않지만 우리 삶의 태도에 대해서 환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원 기자 latehop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