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시작하며 두 권의 책을 접했다. 책장 먼지 속에 갇혀있던 '월든(Walden)'과 직장 동료인 역자로부터 선물 받은 '파열의 시대(Fractured Times: Culture and Social in the 20th Century)'였다. '월든'은 월든 호숫가에서 19세기를 살며 21세기에 도래할 혼돈들을 예견했던 환경사회철학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저서이며, '파열의 시대'는 20세기 이야기를 통해 21세기의 문제를 직시했던 현대사상가 에릭 홉스봄의 유작이다.
느린 삶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주의에 대한 간절한 주장과 물질문명의 폐해에 대한 간곡한 암시가 담긴 '월든', 소수 지배구조가 근간인 자본주의와 이를 통해 발달한 다수 중심의 대중사회 간의 불협화음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논한 '파열의 시대'. 백 년 이상의 시차 속에서 다른 시대를 살았던 저자들의 생각이 다른 듯 닮았다. 미래에 대한 뭔지 모를 답답함과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우리의 현실이 두 책의 시선과 주장에 빠져들게 한다.
정신이 없다. 각종 언론과 방송에서는 연일 팍팍한 지적들만 난무한다. 제조업의 불안한 미래, 유가 하락, 미국 금리 인상 등으로 IMF 사태 때와는 또 다른 엄청난 고통이 다가올 것이라는 예견들. 심지어 한국은 '거대한 경제 양로원'이고 새로운 기업과 차세대 경제시스템이 출현하지 않는, 그래서 희망을 가지기 쉽지 않은 상태라 한다. 국민들은 이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내고 싶고 뭔가를 열심히 돕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그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고 기회조차 가질 수 없는 처지에 한숨을 짓는다.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쪽은 정치권이다. 그런데 늘 그대로이고 지금도 싸운다. 분명 국민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고 선출된 그들은 미래변화에 대한 진취적인 양보와 혁신적인 발상보다는 자신들의 이념 관철과 집단 이익만을 앞세운다. 개인별로는 뛰어난 지성과 비전을 가졌다지만, 모이기만 하면 세상 변화의 반도 따라가지 못하는 경직된 집단으로 변해 버린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국제 정세에 얽힌 복잡한 경제시스템과 엉켜있는 정치 상황을 깊게 파악하기 힘든 국민들은 머리가 혼란스럽고 가슴만 먹먹할 뿐이다.
왜 이리 힘든 것일까. 특별한 부자나 부당이익과 과다이익을 누리는 사람은 아주 소수이고, 반대로 매우 가난한 사람이나 크게 손해 보는 사람도 소수인 그래서 모두가 두런두런 맘 편히 살아가는 그런 삶을 우린 누릴 수 없는 것일까. SNS 기술에 함몰되어 대중 아닌 대중에 끌려 다니기 보다는 땀과 진실만에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삶은 불가능한 것일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경제적 혼란의 근본 원인은 국민 개인별 역량의 합이 지배그룹이 가진 리더십의 총량을 초과했기 때문이며, 자신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 교육체계의 한계점이 정점에 달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묘책은 없다. 유일한 대안은 모든 혼란을 불식시킬 수 있는 '새로운 생산력!' 그것을 꿈꾸고 찾는 일뿐이다. 그 생산력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개혁을 외치며, 혁신만이 살 길이라 주장한다. 이에 대한 소로우와 홉스봄의 생각이 궁금했다. 두 사람 모두 개혁과 혁신의 대상은 남이 아니라 한다. 답은 외부가 아닌 '내부', 물질이 아닌 '정신'에 있다고 한다.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들의 주장이 적절하다면, 혁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은 '우리 스스로의 변화'뿐이다. 다양한 변화가 있겠지만, '위로부터 내려오는 변화'와 '아래로부터 올라가는 변화'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명확하고 쉽다. 그런데 우리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보면 후자가 훨씬 빠를 것 같다.
아래로부터 올라가는 변화를 생각해 본다. 아래는 '우리'와 '나'로 구성된다. 요즘 '응답하라 1988'이란 TV드라마를 통해 많은 사람이 '골목길 문화'와 '공동체적 삶'에 대해 절절히 교감하고 있다. 서울 쌍문동의 막다른 골목길 한쪽에 자리해 누구나 앉을 수 있는 평상 이야기와 주인집과 셋방을 초월하는 나눔의 삶은 약간의 미화와 허구를 뛰어넘고도 남는다. 우스꽝스러운 생각이 든다. 왜 1988년일까. 올림픽을 경계로 확연히 달라진 시대감(時代感) 때문일까. 올림픽 이후 우리는 왜 이리 급하게 변했을까. 우린 뭘 제대로 챙기지 못한 걸까.
최근 한 언론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행복지수의 키워드 중 '가족'과 '봉사'가 가장 높은 점유율을 보였다. 봉사라는 키워드의 등장은 뜻밖이고 정말 신선하다. 국민의 높아진 성숙도를 짐작게 한다. '기증'이라는 신문화도 행복의 언저리에 자릴 잡았다 한다. 봉사와 기증, 두 키워드의 주 대상은 모두 '우리'다. 남을 이길 필요도 없고 이겨 본들 그 의미를 찾을 수도 없는 그런 '월든 호수가'가 조금은 다가온 느낌이다.
우리가 변하려면 우리의 기초구성 단위인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부터 삶의 지향점이 비슷한 사람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젊은이들이 지향하는 미래 목표점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좁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가질 수 없는 화려한 쇼윈도를 응시하는 세대심리를 풍자한 '쇼윈도 세대'라는 말도 등장했다.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불만에 팽배한 우리 젊은 세대를 칭하는 말이라 하니 서글퍼진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인가.(중략) 우리는 헛된 현실이라는 암초에 우리의 배를 난파시켜서는 안 되겠다." 170년 전 소로우의 독백이다.
물질과 명예, 과욕과 타협에 찌든 현실을 뛰어 넘으려 하는 진실성과 진취적인 다양성이 우리에게 절실한 순간이다. 길러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대중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의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30년 전, 쇼윈도를 부수고 뛰어 들어갈 기세였던 다섯 청년이 살던 쌍문동 골목길! 다시 돌아갈 수는 없을까.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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