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딸 같은 부산 출신 새댁 이야기로 국제신문과의 인연을 연다. 10년도 훨씬 전에 중국 베이징 국제도서전에서 한국 출판사 직원과 작가 사이로 처음 만났다.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이었다. 중국어도 잘하고 수더분한 성격에 내 아이 또래여서 스스럼없이 대하며 금방 친해졌다.

상위권 대학에서 본래의 전공에 중국어까지 복수전공으로 학부를 마쳤지만 오랫동안 취업이 여의치 않았다. 세 자매의 장녀로 부산에 사시는 부모님께 면목이 서지 않아 서울에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명절 홍삼특판 아르바이트 때는 한복을 차려입고 마트에서 온종일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인사도 했다. 그러다가 어렵게, 그야말로 첫 정규직으로 출판사에 취업을 한 것인데 박봉과 상관없이 날마다 내 책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행복하더란다.

10여 년 전 그 무렵, 출판계에서는 다양한 기획물이 쏟아져 나왔다. 덩달아 출판사 직원들에게 야근은 일상이었고 휴일 출근도 다반사였다. 어쩌다 출판사에 들러 얼굴을 마주하면 피기도 전에 시들어가는 몰골이었다. 그래도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반기고, 힘들지 않느냐 물으면 날마다 일할 수 있으니 그게 즐거움이고 희망이라고 대답했다.

어쩌다 일요일에 격려의 밥 한 끼라도 사주려고 전화하면 통화가 되지 않았다. 다음날 물으면 짐작대로 반지하방에서 기절한 듯 잠에 취해 있었단다. 그런 고단함에 희망의 싹이 시들지 않을까 걱정될 무렵 직장을 옮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기업 자회사쯤 되는 외국어교육 업체에 스카우트(!)된 것이었다. 출판사에서의 다양한 경험이 교재 개발에 적합했고, 밝고 부지런한 성품도 한몫했다.

회사를 옮기고도 내 신간 사인회가 열리면 찾아와 옆에서 도장을 찍어주는 수고도 했다. 내 아이와 친구가 되기도 했지만 절로 마음이 가 몇 번 밥을 사면 저도 한 번씩 꼭 밥을 사려 했다. 출판사보다는 훨씬 높은 급여라 밥 한 끼 정도는 살 만하다나….

반지하에서 오피스텔로 옮기고, 배낭여행으로 세상을 누비고, 수년 전부터는 대학원에서 공부도 다시 하고…. 걱정은 결혼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만나면 "결혼 안 하느냐" 소리치게 되고 "머슴아들이 날 못 알아보네요" 하고 눙치더니 지난해 드디어 남자를 만났다. 그것도 고시에 합격한 5급 공무원의 듬직한 총각으로. 꽤 늦은 나이인데 "어떻게 맞춤한 놈을 잡았느냐" 물었더니 "절 기다린 거죠"라고 한다. 푸하하!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둘이서 셋방 구하러 다니느라 발품을 판다는 소리에 나는 부동산을 탓하는데 그 녀석은 "저 결혼식 때 외국 나가시면 안 돼요" 했다. 드디어 결혼날. 부산 결혼식장에서 아주 예쁘게 변신한 신부를 만나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는지 물었더니 물경 쿠바란다, 얼마나 멋진 청춘인가! 내일 몇 시 비행기냐고 묻자 "안 가르쳐줘요. 선생님 따라 오시려고 그러죠" 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었다.

이제 대망의 새댁은 되었는데 아쉬운 건 출산이다. 늦은 결혼이라 많아야 둘 정도일 것 같은데, 하늘의 축복으로 단번에 다섯 쌍둥이쯤 보았으면 좋겠다. '부산' '선남' '선녀' '행복' '약속'으로 이름 짓고.

오포, 칠포에 희망 따위는 없다는 듯 세상이 어둡다. 물론 기성세대와 국가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렇지만 세상 흐름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한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돌이켜 보면 희망만 가득한 세상이란 한 번도 없었고 언제나 어둡고 불안했다. 그래도 헤치며 살아오고 한 발씩 걸어왔기에 오늘이 있는 것이다. '희망'을 붙잡고 '행복'을 꿈꾸면서.

원망과 분노는 희망과 꿈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 옵션이다. 모든 이가 원하는 대로 판을 깔아주는 세상은 없다. 그런 바람은 희망이 아니기에 설령 있더라도 행복은 얻을 수 없고 옵션도 사용불가이다.

먼저는 자신만의 꿈과 희망을 잡는 거다. 첫걸음의 목표가 버거우면 일단 눈높이를 낮추는 것도 필요하다. 당장은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웃음은 잃지 말아야 한다. 차근차근 저마다의 개성과 능력으로 자신의 세상을 가꾸다 보면 반드시 내미는 손도 나오는 법이다. 초조해 하지도 마라, 시간은 넉넉하다. 60·70이 아니라 100세를 거뜬히 살아갈 인생 아닌가. 세상의 잣대에 휘둘리지도 마라. 20대 명퇴도 나오는 세상인데 오늘의 잣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회사에서 가축처럼 일한다는 의미의 '사축(社畜)'이란 해괴한 소리도 회자된다. 아주 근거 없는 소리도 아니다.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하면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다. 금수저 세상도 한 길이 아니다. 내 삶의 주인이 나이면 그게 곧 금수저 세상 아닌가.

그렇게 최선을 다한 다음에도 희망의 길이 보이지 않으면 그때는 모두가 함께 옵션을 꺼내 드는 거다. 징징거리는 원망이 아니라 세상을 뒤엎는 분노의 옵션을. 최선을 다한 뒤의 분노라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권력을 얻으려는 자가 스스로 무릎 꿇게 할 수 있고, 분노가 뭉쳐 권력을 장악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 그때는 '혼용무도(昏庸無道:나라 사정이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어지럽다)' 따위의 서글픈 사자성어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다름 아닌 뜨겁게 사랑하는 거다. 청춘에게 사랑이 없어서야 어찌 청춘이라 할 수 있을 텐가. 내일이 불안하다고 사랑에 등을 보이는 것은 자신의 삶과 희망에서 등을 돌리는 것과 다르지 않은 비겁함이다. 사랑은 힘들기도 하지만 사랑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부모가 되어 보면 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면 세상 못할 짓이 없고 두려운 것도 없어진다. 그런 사랑의 힘이면 청춘에 세상과 맞장 뜨는 정도는 일도 아니다. 분노로 세상을 바꾸는 것도 어렵지 않다.

목숨 걸어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당당하게 사랑부터 고백하라. 그런 사랑의 고백에 마음이 움직이면 내일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기꺼이 손을 잡아줘라. 사랑보다 더 큰 희망은 없을지니.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