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뉴욕 맨해튼의 하이라인 파크(High Line Park, 폐지된 고가화물철교를 보존·재활용한 뉴욕의 명소)를 걸었다. 미트패킹(Meat Packing)과 첼시(Chelsea) 지역을 관통하는 하이라인을 따라가니 약동하는 삶의 에너지가 온몸을 자극했다. 고가화물철도가 내뱉는 분진과 소음이 대세였던 이곳에 새로운 봄기운을 공급한 지 5년이 지났다.

햇살이 내리는 나무벤치에서 헤드폰을 낀 채 눈을 감고 해바라기를 하는 아가씨, 화물철도 기관사만이 볼 수 있었던 맨해튼 뒷동네의 허름함을 즐기는 연인들, 그리고 주변 물류창고들 사이로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허드슨 강을 응시하는 뉴요커들. 차가운 강바람으로 불편한 날이었음에도 하이라인은 천천히 그리고 느린 삶을 즐기고픈 많은 이로 가득했다. 이들 사이로 옷깃을 여민 채 빠른 걸음으로 지나는 사람들. 그들 또한 표정은 느린 삶과 어울려 보였지만 다른 목적을 가진 듯했다. 그들은 하이라인 주변, 수십 개소의 작은 미술관을 찾는 사람이었다. '하이라인과 미술관', 이 조합은 화물철도와 물류창고들의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방치되었던 낡은 창고들이 미술관으로, 또 젊은 층의 급속히 변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지원하는 문화생활장소로 변신하며 맨해튼 문화·경제의 새 활력이 이곳에 집중되고 있다.

2015년 4월. 하이라인의 보존 결정만큼이나 중요한 사건이 이곳에서 있었다. 뉴욕 최고 현대미술관인 휘트니 뮤지엄(Whiteny Museum)의 이전이었다. 그것도 하이라인에서 불과 10m 떨어진 곳에. 뉴욕의 최고급 예술문화가 맨해튼의 거친 뒷골목에 찾아온 것이다. 대형 미술관들이 모여 있는 양지의 문화지대를 버리고 하이라인 보존운동에 동화되어 비좁은 육고기 포장·유통지역에 스스로 자리를 튼 것이다. 2.4㎞의 하이라인 파크! 눈에 보이지 않는 하이라인의 강력한 꿈틀거림은 미트패킹과 첼시 지역을 맨해튼을 넘어 뉴욕의 경제와 문화를 리드하는 핫플레이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

하이라인의 중간쯤에 서니 한 벽돌창고 앞을 바삐 걸으며 큰 소리로 웃고 있는 젊은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또 다른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창고에서 나오고 반대편 창고로 들어갔다. 이 변화의 상황을 뭔가 한 단어로 정리하고 싶었다. 분명 재개발이나 요즘 유행하는 공공이 주도하는 재생사업의 성과는 아니었다.

갑자기 리인벤션(Reinvention·재창조)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한동안 눈길조차 주지 않던 버려진 이곳에서 '뉴욕 스타일의 독특한 재창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리인벤션에는 '자기혁신'이란 또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자기혁신은 '자기 것을 버리지 않고 내적 기능의 쇄신을 통해 완전히 다른 변화를 도모함'으로 설명된다. 자기혁신을 소중히 여기는 미래 도시에서는 A를 B로 쉽게 바꾸지 않는다. A에서 A´로의 변화를 철저하게 먼저 지향한다. 이를 근거로 B를 훨씬 뛰어넘는 C나 D의 가치를 추구한다. 궁극적으로는 S나 Z까지 무한대로 움직여 갈 수 있는 그런 창조적인 시스템을 구축한다.

지금 하이라인과 그 주변에서는 A´에 기반을 둔 C와 D 정도의 변화가 벌어지고 있다. 이 변화는 많은 돈이나 뛰어난 정책·계획의 산물이 아니다. 뉴욕을 사랑하고 오래된 뉴욕을 기억하려 했던 시민정신. 오로지 그것 때문이었다. 건설비용의 50% 이상을 대고 운영관리비의 70%를 감당하는 '하이라인의 친구들(Friends of High Line)!' 1999년 단 2명에서 시작해 현재 6000여 회원과 70여 명의 상근근무자를 보유한 시민재단으로의 발전과정이 바로 하이라인 파크의 탄생을 설명한다. 그들 가슴에 달린 배지에는 '내가 하이라인을 살렸다(I Saved the High Line)'는 문구가 적혀 있다. 또 그들은 '하이라인의 친구들'의 존재 목적을 "다른 사람들이 그들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영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얘기한다. 그렇다. 물류 쇠퇴지역과 폐철교라는 여건을 미래 도시의 비전과 연결시킨 그들의 창의적인 시선과 건강한 시민정신이 재창조의 기초가 된 것이었다.

현대도시는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쉽게 해소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생각지 못했던 더 큰 문제들로 곤경에 처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해소를 위한 근원적인 접근이나 과정보다는 결과와 성과에 집착하는, 또 돈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우리 처지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만 있거나, 시작에 비해 터무니없는 결과가 만들어지곤 하는 것이다.

하이라인의 재창조는 '단순하게, 야생 그대로, 조용히, 천천히'라는 도시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왜 그들은 '화끈하고 쉽게, 빠르게'를 택하지 않은 것일까. 그런 접근으로는 자기혁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폐철도를 걷어내고 크고 높은 빌딩을 지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무미건조한 현대도시의 한 단면이 탄생했을 것이다. 이 결과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도시철학을 철저히 지킨 것이다. 하이라인과 연결된 흔적들과 기억에 대한 그들의 존중이 상상을 초월하는 지역 재창조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시민들의 먹거리를 실어 날랐던 철도에 대한 고마움에 답하려는 그 숭고한 뜻이, 선조들이 보고 느꼈던 것들을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하고 싶었던 그들의 온전한 마음이 하이라인의 재창조를 이루게 한 것이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것이 아니다. 그것을 지키려는 마음과 방향이 바로 역사이고, 그런 역사가 바탕이 되지 않는 도시의 변화는 B 조차도 거둘 수 없는 것이다.

21세기를 리드하려는 도시는 반드시 자기혁신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자기 것과 원래 것을 버리지 않는, 그래서 이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를 재발견하고 키워가는 그런 접근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완벽한 상태의 도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완벽한 도시로 나아가기 위해 자기혁신에 몸부림치는 그런 도시만이 재창조된 미래를 만나게 될 것이다.

경성대 도시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