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론이 화두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개헌론 깃발을 치켜들고 나오면서부터다. 정 의장은 내친김에 '개헌 전도사' 우윤근 전 의원을 국회 사무총장 자리에 앉혔다. '개헌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는 자신의 말을 인사로 재확인한 셈이다.

국회의원들도 절대다수가 개헌에 찬성한다는 통계도 나왔다. 20대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203명이 헌법 개정에 찬성했단다. 국회에서 개헌에 필요한 의결 정족수는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200명 이상)인데 개헌 정족수를 웃돌았다는 것이다(중앙일보 한국정치학회 설문조사).

개헌론은 '87년 체제'의 산물인 현행 헌법이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데서 출발한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 5년 단임제로 인한 공약 남발과 임기 내 성과주의 몰입, 조기 레임덕, 후임자가 전임자의 정책을 전면 부인하는 배제의 정치,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4년)의 불일치로 인한 정치적 낭비와 불안정 등이 현행 헌법의 문제점이라고들 한다. 한마디로 내년이면 개정된 지 30년이 되는 현행 헌법이 그동안 훌쩍 커버린 우리 국민의 몸과 마음에 맞지 않는다는 게 개헌론의 요체다.

현행 헌법은 이승만(12년)-박정희(18년)-전두환(9년)으로 이어지는 39년에 걸친 장기집권과 군부 쿠데타에 저항한 우리 국민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소산이다. 동시에 전두환 노태우 당시 집권세력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 3김씨를 중심으로 한 정파의 정치적 타협물인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국민들은 이제 쿠데타의 위험도 사라졌고, 장기집권 가능성도 없어진 마당에 현행 헌법의 시효도 끝난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국민 대다수도 찬성한다는 개헌은 이제 절차만 남겨둔 걸까. 산술적으로만 보면 국회 개헌 발의와 의결, 국민투표 통과는 누워서 콩떡 먹기처럼 쉬워 보이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도 않다. 현직 대통령부터 차기 청와대를 노리는 대권 후보들, 그리고 각 당의 처지 등에 따라 이해관계가 복잡하다. 또 대통령 중임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 어떤 권력구조를 선호하느냐도 천차만별이다.

그동안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변경 시도는 내가 하면 로맨스이지만 남이 하면 색안경 쓰고 불륜으로 몰아붙이는 것과 같았다. 내각제에 마음을 뒀지만, 직선제를 받아들이거나(노태우), 정략적으로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다가 파기하고 직선제 대통령이 되거나(김영삼), 내각제 약속을 번복했다(김대중). 자력으로 대통령이 될 능력이 2% 부족했던 김종필만 내각제 개헌 약속을 믿고 3당 합당과 DJP연합을 통해 권력을 두 차례나 노려봤지만 헛물만 켰다.

개헌은 청와대가 먼저 들고나오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이다. 당장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쏟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4년 중임제' 원 포인트 개헌 제안이 대표적이다. 당시 야당 리더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단 한마디로 개헌론을 백지화시켜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 재임 중 개헌론 제기 역시 친박계와 야당 반대로 무산됐다. 반대로 김영삼 김대중 박근혜 대통령처럼 계파나 지역의 확고한 정치적 기반이 있으면 재임 중 개헌론은 정권 유지 차원에서 금기어 중 하나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잠룡의 위상에 따라서도 개헌론의 셈법은 달라진다. 메이저급 후보들은 선거판을 흔들고 싶지가 않다. 눈앞에 청와대가 어른거리는데 개헌이네 뭐네 해서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마이너급들은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등을 통해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려 한다. 새누리당 친박계가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끌어들여 이원집정부제를 하고 싶어 하는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다.

정치인들이 현행 헌법을 두고 "이대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에 들어가면 천차만별이다. 과거 국회의장마다 개헌을 주장하고 국회에 개헌추진모임이 결성됐지만 말만 무성하다가 끝났다. 이유는 현직 프리미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대통령과 차기 대권을 노리는 잠룡들의 복잡한 대선 방정식 계산 때문이었다.

개헌이 꼭 필요하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국회의장의 복안대로 내년 4월 이전에 개헌을 마무리하되 발효 시기는 10년 뒤로 돌리는 것이다. 차기, 차차기 대통령도 아니고 2027년 차차차기 대통령 선거부터 적용한다는데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현재 오르내리는 대권 후보가 그때까지 국회의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물론 이 경우에도 넘어야 할 큰 문턱이 하나 있다. 경제에 올 인하겠다고 개헌론에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보여 온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이다. 박 대통령이 단문으로 다음 한마디하는 순간 개헌은 또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 "참 나쁜 국회의원들!"

논설실장 so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