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침묵의 언어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의 정의다. 공간은 말이 없지만 말을 한다는 이야기. 사람은 저마다 고유 공간이 있다는 뜻이다. 친밀감이 없는 공적인 공간은 반경 3.6m 이상, 사무적 관계가 이뤄지는 사회적 공간은 1.2~3.6m다. 0.45~1.2m는 친구 등과 대화하는 정도의 개인적 공간이란다. 45㎝ 거리는 연인, 가족 등 친밀한 관계가 이뤄지는 곳으로 불가침 지역이다.

쉽게 말하면 체취를 느끼는 거리,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거리는 안전지대에 해당된다. 사회적 공간은 다툼이 일어날 때 물리력으로부터 벗어난 거리, 공적인 공간은 심리적, 신체적으로 무관한 거리로 보면 될 듯하다. 낯선 사람이 개인적 공간을 침범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신체적 접촉이 잦아지면 스트레스 수치가 급증하면서 이상 행동으로 이어진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실시한 이집트 땅메뚜기 실험은 공간의 의미를 잘 설명해 준다. 메뚜기의 개체수가 급격히 늘어나 공간이 줄어들면 폭력집단으로 돌변한다. 행복의 호르몬인 세로토닌 급증이 그렇게 만든다는데, 가뭄 때 천적이 사라져 대규모로 번식할 때 발생한다. 먹이 부족으로 이동하면서 메뚜기 떼는 농작물을 초토화시키는 약탈자로 둔갑한다.

공간 부족이 야기하는 스트레스는 동식물이 똑같다. 밀식과 대량생산으로 인해 면역체계가 파괴된다. 스트레스받은 동식물, 그걸 사람이 흡수하면 결과는 뻔하다.

각설하고, 사람에겐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다. 현대는 산업화, 도시화의 시대였다. 1960년 28%가 채 안 되던 우리나라 도시화율은 90%를 상회하고 있다. 도시화로 인한 개인적 공간의 축소는 갖가지 사회 문제를 잔뜩 부풀려 놓았다. 소득에 반비례해 행복지수가 떨어지는 건 상대적 박탈감도 있지만 공간의 축소와도 관련이 있다.

서울은 도시화 병폐의 집결체다. 부산보다 땅덩어리가 160㎢나 작다. 그곳에 부산보다 3배나 많은 1000만 명의 인구가 산다. 국토 면적의 0.6%에 인구 5분의 1이라? 메뚜기 떼와 다름없다.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사는 기형적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서울의 인구 밀집도는 세계 40위지만 OECD 제1 도시 중엔 최고로 높다. 이대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그런 이야기다.

따지고 보면 부산도 너무 비좁다. 고층 아파트와 빌딩이 계속 들어서는 건 그 증좌다. 360만 인구가 살기엔 답답한데 서울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한데도 수도권 규제 완화에 올인해 온 게 이명박, 박근혜 정부다. 인구 집중은 권력과 부의 집중으로 갈등과 반목을 야기하는 온상이다.

'관습헌법상 수도는 서울이다.' 2004년 노무현 정부가 신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하자 헌법재판소가 내린 결정이다. '관습헌법'이란 해괴한 논리를 들이대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서울에 청와대, 국회, 대법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 번 수도는 영원한 수도다.' 세상에 이런 억지가 있나. 그런 법은 듣도 보도 못한 법이다. '서울병'이 하마 골수에 깊이 박혔다.

이 일은 한국병의 압축도다. 산업화 과정에서 축적된 한국병의 근저는 수도권 집중이었다. 모든 재원의 집중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역으로 심각한 불평등을 낳았다. 국가란, 정치 권력이란 부를 골고루 나누는 게 제 역할이다. 한데 거꾸로 부의 편중만을 추구해 왔으니 오늘날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정치권에서 분권형 개헌과 청와대, 국회의 지방 이전이 논의되는 것은. 세종시의 국회 분원 설치는 시작이다. 무소속 이해찬 의원이 발의한 20대 국회 1호 법안엔 여야 의원 38명이 서명했다. 정세균 의장이 국회 차원의 검토를 약속했고,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받았다.

아예 국회와 청와대를 세종시로 옮기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정치, 경제 권력이 한 곳에 집중돼 대한민국 중병을 앓고 있다며 개헌을 통해 실현하자고 제안했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남 지사와 뜻을 모으겠다고 다짐했다. 문재인 더민주 전 대표는 지난 대선 때 청와대, 국회 세종시 이전을 공약한 바 있다.

20세기는 도시화, 집중화의 시대였다. 압축 성장하려면 선택과 집중은 필요악이었다. 그로 인해 수도권 집중, 재벌 경제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었다. 지금, 그 기울기가 45도 가량 될 듯하다. 경제가 정체되고 산업이 길을 잃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울기가 좀 더 기울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진다.

파국을 막으려면 지방화, 분산, 분권의 시대로 가야 옳다. 수도 이전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세상일이 한 쪽으로만 계속 갈 순 없다. 정이 있으면 반이 있어야 합이 나온다. 부와 인구의 집중이 심화됐으면 분산이 뒤따라야 답이 나온다. 인구 분산은 국민 행복감을 높이는 첩경이기도 하다. 국민 개개인의 적정한 공간, 그걸 허락해야 한다.

논설고문 aiw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