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오종 씨 오두막집은 정자나무 바로 아래 있었다. 그는 아침밥을 뜨자마자 빳빳하게 풀 먹인 하얀 모시옷을 걸치고 정자나무 밑에 진설해 둔 바둑판이나 장기판 앞에 앉았다. 오척단구에다 살까지 쪄서 멀리서 보면 큰 염소가 정자나무 밑에 앉아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는 일이라곤 오가는 사람을 붙들고 바둑을 두는 거였다. 가난한 살림에 청빈한 신선놀음이겠거니 하겠지만 '아니올시다'이다. 어쭙잖은 문자깨나 들었다고 마을 행사나 어느 집 잔치라도 있을라치면 오지랖 넓게 감 놔라 배 놔라 했다.

그가 집안일을 거드는 걸 본 적이 없다. 아내는 허리가 끊어지라고 일을 해도 그는 바둑판만 노려볼 뿐이었다.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마당에 널어둔 고추며 참깨 다발이 비에 젖어도 그는 모시옷 젖는 것만 걱정할 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밭에서 일하다 허우적거리며 아내가 비설거지 하러 오자 험한 말로 꾸짖기만 했다. 요즘 같은 무더운 여름 낮에 마을 사람들 모두 논에서 농약을 치거나 피사리를 할 때도 그는 여전히 정자나무 아래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저 멀리 시원한 그늘에 앉아 있는 오종 씨를 바라보며 "사내 팔자는 오죙이 같아야 하는데"라고 부러움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했고, 여자들은 "호랭이가 칵 물어갈 인사"라고 주먹질을 해댔다. 그는 그렇게 살다가 저세상으로 갔다.

그는 요즘 표현을 빌자면 '꼰대'다. 학생들은 그가 정자나무 아래 보이면 길이 멀어도 돌아갔다. 붙잡혀 잔소리를 듣는 고통을 피하는 길은 그 길밖에는 없었다. 청년들이나 부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피인물이었다. 나이로는 노인이었으나 존경받는 어른은 결코 되지 못했다.

꼰대. 학생들이 부모나 선생님을, 젊은이들이 늙은이를 일컫는 은어다. 이제는 직장이나 사회 등 곳곳에서 선배나 상사 같은 구세대를 지칭하는 단어로 범위가 넓혀졌다. 꼭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남성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일반화해 진리인 것처럼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죄다 꼰대로 몰린다.

꼰대 자가테스트가 있다. "내가 너희만 할 땐~"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누굴 만나면 나이부터 확인하고 어리면 말을 놓는다.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고는 막상 그렇게 하면 기분 나빠한다.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자"고 해놓고는 내가 먼저 답을 내놓고 있다. 나보다 늦게 인사하는 후배가 거슬린다.

가슴이 뜨끔하다. 벌써 몇 개가 해당한다. "우리 때는 말이야, 선배들이 술 마시자고 하면 병원 약봉지 들고 다니면서도 따라갔는데 요즘 기자들은 이리 빼고 저리 빼고~" 어쩌고 하는 허풍부터 목에 걸린다. 문화평론가 이재현의 '꼰대질' 정의다. '폭력이 더는 직접 행사되지 않는 권위주의적 위계질서 안에서 이뤄지는 명령, 지시, 훈계, 잔소리, 충고, 조언 등에서 생겨나는 문제'라고. 공공의 적이 되다시피 하는 꼰대의 대척점에는 멘토가 있다.

꼰대와 멘토는 한 끗 차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크다. 멘토는 남이 요청하면 충고를 하지만 꼰대는 자기 마음대로 충고한다. 멘토는 미래를 말하는데, 꼰대는 과거만 떠벌린다. 멘토는 자신의 실패사례도 얘기하는데 꼰대는 "내가 왕년에는~"하며 성공신화만 말한다.

지난해 화제가 됐던 영화 '인턴'은 꼰대 아닌 멘토가 어떤 모습인지를 이상처럼 그렸다. 직장생활 40년에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고 부사장으로 은퇴한 70세의 벤(로버트 드 니로 분). 그가 창업 1년 반 만에 직원 220명의 성공신화를 이룬 열정적인 30세 여성CEO 줄스(앤 해서웨이 분)의 시니어 인턴으로 채용돼 겪는 일을 잔잔한 감동으로 엮어내고 있다. 벤은 나이가 많다고 결코 대접받으려 하지 않는다. 가르치려 들지도 않았다. 노하우를 전수하거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린다. 묵묵히 지원하고 챙겨줄 뿐이다. 필요하면 조언해주되 간섭하지 않았다. 처음엔 노인네로 취급하던 젊은이들이 그 주위로 모여들었다. 저렇게 늙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롤 모델이다. 젊은이들이 존경하는 어르신이 거기 있었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지식과 경륜이 늘고 인격이 높아질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무식이 늘고, 절제하지 않으면 탐욕이 늘며, 성찰하지 않으면 파렴치만 늘어갑니다. 나이는 그냥 먹지만, 인간은 저절로 나아지지 않습니다'. 역사학자 전우용의 말이다.

결국은 소통능력이다. 꽉 막힌 머리와 가슴으로는 세대 간, 계층 간, 조직 내 불통만 쌓일 뿐이다. 그래서 꼰대 방지 5계명은 새겨놓을 만하다. 잘못을 뻔히 보고도 속이 터지려는 걸 꾹 참아야 하는 인내심이 우선 필요하겠다.

내가 틀렸을지 모른다. / 내가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말하지 말고 들어라. 답하지 말고 물어라. / 존경은 권리가 아니라 성취다.

논설실장 so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