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강력한 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의 동북지방을 강타했던 그해, 나는 연구년으로 오사카에 머물고 있었다. 행정절차 때문에 출입국사무소에 다녀왔던 3월 11일 그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의 가족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의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가 한국의 뉴스를 온통 도배하고 있는데 괜찮느냐는 거였다. 나는 얼른 TV를 켰고 엄청난 쓰나미가 도시를 휩쓰는 모습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장면을 보게 되었다. 참혹한 재해현장과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던 원전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지곤 한다.

그런데 2011년은 그것만이 일본을 강타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 행정부의 고위관료가 끔찍한 실언으로 정국을 뒤흔든 사건도 있었다. 그 관료 발언의 핵심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오키나와를 강간하겠다는 거였다. 식민지를 제국에 의한 강간으로 비유하는 것은 수사적으로 낯선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식민지 말기 '내선일체'를 내세웠던 식민지 당국은 그 실현을 위해 내선결혼 즉 일본인과 조선인의 결혼을 장려했다. 그렇지만 그 결혼은 평등한 관계를 전제할 수 없고 한쪽의 의사가 무시된 강제적인 결혼, 다시 말해 강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식민지를 강간당한 지역으로 비유하는 것은 상대방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뤄지는 제국의 폭력성을 드러내기 위한 수사인 셈이다. 제국이 강간하는 식민지라는 이미지를 위안부만큼 잘 예증하는 존재가 또 있을까. 그런데 그 일본 고위관료는 그 수사의 비유성을 결락시킨 채 식민지를 강간의 대상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므로 이 발언은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오키나와에서는 정권 퇴진운동까지 거론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국 일본 정부의 공개적인 사과와 해당 관료를 중징계하는 선에서 이 사건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갑자기 이 사건이 떠오른 것은 두어 달 전 교육부 고위관료가 우리나라 국민 99%를 개·돼지에 비겨 말하면서 신분제가 공고해져야 한다고 했던 발언 때문이었다. 그 관료는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말했지만 영화 등의 예술적 형식이 지니는 비유성을 결락시킨 채 국민의 99%를 개·돼지라고 해 버렸고 바로 이 점에서 두 나라 관료의 발언은 묘하게도 닮았다. 두 관료의 발언이 시기와 장소만 달랐지 마치 데자뷔 같은 느낌을 준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민의 99%가 개·돼지라며, 그들은 적당히 던져주는 먹이만 받아먹으면 된다는 인식. 너무나 충격적이지만 이와 비슷한 발언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국내 유력한 정치인의 아들이 국민을 미개인이라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어디에서나 지배계층의 인식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99%의 개·돼지가 사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나라.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자화상인가? 아니면 극소수 사람의 비뚤어진 가치관인가? 99%가 개·돼지라면 그 사회는 불가에서 말하는 축생지옥일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불가에서는 괴로움이 많고 즐거움이 적으며 성질이 무지해 식욕과 음욕만이 강하고, 부자 형제의 차별이 없이 서로 잡아먹고 싸우는 짐승의 세계를 축생도 또는 축생지옥이라 한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흔히 이야기되는 '헬조선'이라는 표현을 극도로 싫어하는 1%의 지배계층이 국민의 99%를 개·돼지라고 한 것은 결국 우리나라가 헬조선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 아닌가.

요산 김정한의 '축생도'를 다시 읽었다. '도둑골'이라는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짐승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분통'이를 둘러싼 이야기가 뼈대를 이루는 소설이다. 아기를 낳은 후에도 고된 노동에 시달렸던 분통이는 결국 병이 나서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분통이의 남편 '바우'는 분통이를 달구지에 싣고 읍내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그의 몰골로 짐승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 미리 짐작했던 의사들은 아무도 분통이를 치료해 주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바우는 분통이를 가축병원으로 데려갔고, 사람은 진료하지 않는다던 수의사는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고 그녀를 수술해 생명을 구해낸다. 그렇지만 분통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의사들은 오히려 수의사를 고발해 더는 가축조차 진료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1968년 발표된 이 소설이 오늘날 왜 이렇게 다시 읽혀야 할까.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99%인 우리는 병이 나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수의사에게 갈 수밖에 없었던 분통이처럼 우리도 동물병원에 가야 하는가. 개·돼지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그리고 내가 개·돼지에게 자꾸만 미안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부산대 국문학과 교수